지난 2016년 7월 25일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五臺山史庫本/국보)’이 우리 박물관 수장고의 새 식구가 되었습니다.
조선왕조의 모든 왕대에 걸쳐, 왕의 사후 재위 기간 중 있었던 일을 정리하여 편찬한 국가기록물을 ‘조선왕조실록’이라고 합니다. 실록은 당대에 열람하거나 활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왕도 함부로 볼 수 없었으며, 후세의 평가를 염두에 두고 바르게 기록하고 안전하게 잘 보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실록 같은 중요한 기록물은 전쟁이나 화재, 천재지변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같은 책을 여러 부 만들어 여러 곳에 나누어 보관하였습니다. 이렇게 분산 보관하는 것을 ‘분상(分上)’이라고 하며, 분상하여 보관하던 시설이 바로 ‘사고(史庫)’입니다. 그 중 오대산의 사고에 보관하던 실록이 ‘오대산사고본’입니다.
조선초기에는 서울의 춘추관을 비롯하여 충주·성주·전주 등 네 곳에 사고(4대 사고)를 두고 실록을 보관하였는데, 임진왜란으로 전주사고만 다행히 화를 면하게 되었습니다. 임진왜란 후 전주사고본을 모본으로 실록을 다시 간행하였는데, 이때 기존의 서울 춘추관과 새로 설치된 강화도·태백산·묘향산사고 등 4곳에 실록을 1질씩 봉안하였으며, 강원도 평창 오대산에도 새로 사고를 설치하고 ‘교정본’ 실록 1질을 봉안하였습니다.
오대산 사고는 임진왜란 직후(1606년경) 설치되어 1910년경까지 운영되었습니다. 오대산 사고는 다른 사고와 마찬가지로 실록을 비롯한 의궤, 왕실 족보 등 중요 문헌을 봉안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1910년 일제가 도서 조사와 정리 사업을 벌이면서 각 사고의 도서를 반출하기 시작하였고, 사고들은 점차 본연의 기능을 잃게 되었습니다. 결국 오대산 사고도 일제에 의해 더 이상 사고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오대산 사고에 있던 태조~철종까지의 실록 788책(‘책’은 서적을 세는 단위인 ‘권(卷)’과 같은 의미입니다.)은 조선총독부에 의해 1913년 일본 동경제국대학 부속도서관으로 이관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23년 일본 동경에 강진이 발생(관동대지진)하면서 실록을 보관하던 도서관에 불이나 대부분의 실록이 소실되는 참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당시 대출 중이던 74책은 지진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 74책 중 27책(중종실록 20책, 선조실록 7책)은 1932년 서울의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되어 광복이후 서울대학교에서 소장 관리하게 되었고, 나머지 47책(성종실록 9책, 중종실록 30책, 선조실록 8책)은 광복이후에도 여전히 동경대학교에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동경대학교에 남아있던 실록에 대해서는 광복 후 50년이 되도록 제대로 된 실태 조사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1995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처음으로 현황 조사를 하게 되었고, 2006년에는 ‘조선왕조실록 환수위원회’가 출범하면서 본격적으로 실록 환수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그 결과 2006년 7월 일본에 있던 실록 47책이 우리나라를 떠난 지 93년 만에 환수되었습니다.
이후 문화재청이 국립고궁박물관을 오대산사고본 실록 74책의 관리단체로 지정함에 따라서, 지난 2016년 7월 25일부터 우리 박물관이 이를 인계받아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오대산사고본 실록이 다른 사고의 조선왕조실록과 다른 점은 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교정을 보았던 ‘교정본’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현재 오대산사고본 실록(74책)은 성종실록 9책, 중종실록 50책, 선조실록 15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중 임진왜란 직후 재 간행된 성종실록과 중종실록은 군데군데 붉은 글씨(朱書)와 검은 글씨(墨書)로 수정·삭제 등을 지시하는 교정부호가 남아 있는 교정본입니다. 오대산 사고본에 표기된 교정 내용은 완성본인 다른 사고본에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완성본도 아닌 교정본을 책으로 만들어 사고에 분상하였던 것일까요? 당시 어려웠던 경제 상황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실록을 재 간행하던 시기는 임진왜란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라 활자도 모자라고 종이도 몹시 귀했습니다. 전란으로 많은 물자가 유실되었고 공급도 원활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종이의 질은 떨어지지만 내용상 완성본 실록과 다름없는 교정본을 그냥 버리기는 아까웠을 것입니다. 오늘날 이 교정본 실록들은 서지학적으로 매우 가치가 높은 것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실록의 편찬과정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은 임진왜란이라는 전쟁 끝에 태어나서 망국으로 인해 국외로 떠돌다 관동대지진이라는 천재지변을 만나 대부분 소실되었지만, 그런 시련을 이겨내고 끝까지 살아남은 74책이 오늘 우리와 함께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대산사고본이 국내로 환수되고 안전하게 관리될 수 있도록 힘써주신 모든 분들께 고마움을 전하며 이야기를 마칩니다.
이글은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하였습니다.
1. 서울대학교 산학협력단, 『조선왕조실록의 편찬과 보존관리』(2011), 조선왕조 기록문화유산 학술 심포지움 발표자료집
2. 서병패, 「오대산사고본 선조실록 판본 연구」, 『서지학보』 제30호(2006), pp.5-32
김성배(유물과학과장)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지난 2016년 7월 25일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五臺山史庫本/국보)’이 우리 박물관 수장고의 새 식구가 되었습니다.
조선왕조의 모든 왕대에 걸쳐, 왕의 사후 재위 기간 중 있었던 일을 정리하여 편찬한 국가기록물을 ‘조선왕조실록’이라고 합니다. 실록은 당대에 열람하거나 활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왕도 함부로 볼 수 없었으며, 후세의 평가를 염두에 두고 바르게 기록하고 안전하게 잘 보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실록 같은 중요한 기록물은 전쟁이나 화재, 천재지변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같은 책을 여러 부 만들어 여러 곳에 나누어 보관하였습니다. 이렇게 분산 보관하는 것을 ‘분상(分上)’이라고 하며, 분상하여 보관하던 시설이 바로 ‘사고(史庫)’입니다. 그 중 오대산의 사고에 보관하던 실록이 ‘오대산사고본’입니다.
조선초기에는 서울의 춘추관을 비롯하여 충주·성주·전주 등 네 곳에 사고(4대 사고)를 두고 실록을 보관하였는데, 임진왜란으로 전주사고만 다행히 화를 면하게 되었습니다. 임진왜란 후 전주사고본을 모본으로 실록을 다시 간행하였는데, 이때 기존의 서울 춘추관과 새로 설치된 강화도·태백산·묘향산사고 등 4곳에 실록을 1질씩 봉안하였으며, 강원도 평창 오대산에도 새로 사고를 설치하고 ‘교정본’ 실록 1질을 봉안하였습니다.
오대산 사고는 임진왜란 직후(1606년경) 설치되어 1910년경까지 운영되었습니다. 오대산 사고는 다른 사고와 마찬가지로 실록을 비롯한 의궤, 왕실 족보 등 중요 문헌을 봉안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1910년 일제가 도서 조사와 정리 사업을 벌이면서 각 사고의 도서를 반출하기 시작하였고, 사고들은 점차 본연의 기능을 잃게 되었습니다. 결국 오대산 사고도 일제에 의해 더 이상 사고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오대산 사고에 있던 태조~철종까지의 실록 788책(‘책’은 서적을 세는 단위인 ‘권(卷)’과 같은 의미입니다.)은 조선총독부에 의해 1913년 일본 동경제국대학 부속도서관으로 이관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23년 일본 동경에 강진이 발생(관동대지진)하면서 실록을 보관하던 도서관에 불이나 대부분의 실록이 소실되는 참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당시 대출 중이던 74책은 지진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 74책 중 27책(중종실록 20책, 선조실록 7책)은 1932년 서울의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되어 광복이후 서울대학교에서 소장 관리하게 되었고, 나머지 47책(성종실록 9책, 중종실록 30책, 선조실록 8책)은 광복이후에도 여전히 동경대학교에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동경대학교에 남아있던 실록에 대해서는 광복 후 50년이 되도록 제대로 된 실태 조사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1995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처음으로 현황 조사를 하게 되었고, 2006년에는 ‘조선왕조실록 환수위원회’가 출범하면서 본격적으로 실록 환수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그 결과 2006년 7월 일본에 있던 실록 47책이 우리나라를 떠난 지 93년 만에 환수되었습니다.
이후 문화재청이 국립고궁박물관을 오대산사고본 실록 74책의 관리단체로 지정함에 따라서, 지난 2016년 7월 25일부터 우리 박물관이 이를 인계받아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오대산사고본 실록이 다른 사고의 조선왕조실록과 다른 점은 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교정을 보았던 ‘교정본’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현재 오대산사고본 실록(74책)은 성종실록 9책, 중종실록 50책, 선조실록 15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중 임진왜란 직후 재 간행된 성종실록과 중종실록은 군데군데 붉은 글씨(朱書)와 검은 글씨(墨書)로 수정·삭제 등을 지시하는 교정부호가 남아 있는 교정본입니다. 오대산 사고본에 표기된 교정 내용은 완성본인 다른 사고본에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완성본도 아닌 교정본을 책으로 만들어 사고에 분상하였던 것일까요? 당시 어려웠던 경제 상황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실록을 재 간행하던 시기는 임진왜란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라 활자도 모자라고 종이도 몹시 귀했습니다. 전란으로 많은 물자가 유실되었고 공급도 원활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종이의 질은 떨어지지만 내용상 완성본 실록과 다름없는 교정본을 그냥 버리기는 아까웠을 것입니다. 오늘날 이 교정본 실록들은 서지학적으로 매우 가치가 높은 것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실록의 편찬과정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은 임진왜란이라는 전쟁 끝에 태어나서 망국으로 인해 국외로 떠돌다 관동대지진이라는 천재지변을 만나 대부분 소실되었지만, 그런 시련을 이겨내고 끝까지 살아남은 74책이 오늘 우리와 함께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대산사고본이 국내로 환수되고 안전하게 관리될 수 있도록 힘써주신 모든 분들께 고마움을 전하며 이야기를 마칩니다.
이글은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하였습니다.
1. 서울대학교 산학협력단, 『조선왕조실록의 편찬과 보존관리』(2011), 조선왕조 기록문화유산 학술 심포지움 발표자료집
2. 서병패, 「오대산사고본 선조실록 판본 연구」, 『서지학보』 제30호(2006), pp.5-32
김성배(유물과학과장)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