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문화유산] 태조 추상시호 금보와 옥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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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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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보·인장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인장은 의례용 어보, 행정목적의 국새, 개인적 인장 등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어보는 국왕, 왕비 등 왕실 주인공의 공덕을 찬양하거나, 국왕 통치를 재평가하는 의미를 담은 이름을 새긴 도장으로, 주인공의 공덕을 칭송하는 글을 담은 어책(御册)과 함께 제작하였습니다. 의례용 어보는 주인공 사후 종묘에 모셔 왕조의 영속성을 의미하는 상징물이 되었습니다. 국새는 통치에 사용한 실무용 인장입니다. 그 모양이나 형식은 의례용 어보와 동일하나 용도별로 다양하게 제작되는데, 종묘에 모셔 철저히 관리한 어보와는 달리 현재는 일부만 남아있습니다. 개인용 인장은 왕이나 왕비 등 왕실 인물들이 개인적인 목적으로 사용한 도장으로 왕실 내·외부 간에 오가는 문서나 예술과 시 등의 취미와 연관된 활동에 사용되었습니다.


태조 추상시호 금보와 옥책(太祖追上諡號金寶 · 玉冊)


연대 - 1683년 

재질 - 금속, 금동제, 옥, 견 

크기 - 금보높이: 7.3cm, 보뉴너비: 8.9cm, 보뉴길이: 11cm, 보신가로: 9.6cm, 보신세로: 9.6cm, 보수: 60.7cm

          옥책세로: 25.3cm, 두께: 1.7cm, 길이: 214.5cm, 폭: 19.2cm, 편폭(片幅): 3.9cm 

지정현황 - 세계기록유산(2017년) 




태조 추상시호 금보는 1683년(숙종 9) 태조에게 ‘정의광덕(正義光德)’이라는 시호를 추가로 올리면서 제작한 어보이다.
시호는 사후에 바로 정하여 금보에 새기고 그 뜻을 옥책에 새겨 올렸다. 그런데 태조의 시호를 사후 200여 년이 지난 숙종 대에 추가로 올린 데에는 두 가지 명분이 있었다. 첫째, 시호의 글자 수가 후대 왕들보다 적다는 것이었다. 조선시대 선왕의 시호는 일반적으로 8자였는데, 태조는 생시에 받은 존호 ‘계운신무(啟運神武)’를 제외하면 4자의 시호를 받았고, 시호와 존호를 합쳐 8자 ‘지인계운 성문신무(至仁啟運 聖文神武)’인데 비해 후손인 세조와 선조의 경우 각각 20자와 24자나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후손이 선조보다 더 존귀함을 받는 형국이었다. 둘째, 태조의 위화도 회군의 공적을 담은 시호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박세채(朴世采, 1631~1695) 등이 위화도 회군의 의리는 시호 가운데 첨가할 수 없다고 주장했는데,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상소를 올려 태조의 기존 시호가 그의 공덕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고 하였다. 숙종은 송시열의 건의를 받아들여 태조의 기존 시호에 ‘정의광덕’이란 시호를 추가로 올렸다.


어보의 인면에는 ‘강헌 지인계운 성문신무 정의광덕 대왕지보(康獻至仁啟運聖文神武正義光德大王之寶)’라고 새겼다. ‘강헌(康獻)’은 중국 명나라 황제가 내린 시호이며 ‘지인계운(至仁啟運)’과 ‘성문신무(聖文神武)’는 1408년(태종 8)에 올린 존호와 시호이다.


이와 함께 제작한 옥책은 태조의 성품과 공적을 나열하고, 시호를 추가로 올리게 된 명분을 적고 있다.
이 옥보와 옥책은 태조의 위화도 회군을 부각시켜 명나라에 대한 사대의식을 기린 것으로 조선후기의 시대정신인 대명의리론을 잘 보여준다.

어보의 구조 : 손잡이[귀뉴], 인끈[인수], 보끈[보수], 인면, 보면 인판, 보판, 방울, 술

관련 소장품 : 태조비 신의왕후 추상존호 옥보 종묘13555, 세계기록유산(2017년) 태조비 신의왕후의 옥보는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연호를 광무로 황제에 등극하면서 중국과 대등한 위치에 놓이게 되자 천지에 제사를 지내고 선조들을 추존하면서 1899년(광무 3) 제작한 어보이다. 신의왕후(1337~1391)의 성은 한씨(韓氏), 본관은 안변(安邊)이며 안천부원군(安川府院君) 한경의 딸이다. 방우 ・방과(정종)・방의・방간・방원(芳遠: 태종)・방연(芳)의 6남과 경신・경선(慶善)의 두 공주를 낳았다. 태조 즉위 후 절비(妃)의 시호와 1408년(태종 8)에 승인순성(承仁順聖)의 휘호가 추상(追上)되었다.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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