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고궁박물관에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수정전(壽靜殿)’이라는 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현판 1점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테두리에 별도의 화려한 조각이나 채색 장식 없어 매우 소박해 보이는 현판이지만 현판이 걸린 건물은 몇 가지 면에서 의미 있었습니다. 수정전의 처음 이름은 ‘수정당(壽靜堂)’ 이었습니다. 수정전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 시기는 정조 18년(1794) 때입니다. 다음해인 정조 19년이 왕대비(영조계비 정순왕후)의 나이가 망륙(望六, 51세)이고 모후인 혜경궁(헌경왕후 추존)의 회갑이 되는 해여서 축하 행사를 준비하면서 옥보와 옥인 등 올리는 장소를 수정당으로 결정하였는데, 이 때 수정전으로 격을 높인 것입니다.
수정전으로 바뀐 수정당은 효종 임금 때 창경궁내 통명전(通明殿)에서 생활하던 왕대비(인조계비 장렬왕후)를 창덕궁 안으로 모시고자 고쳐 지은 건물입니다. 앞서 조선 초기 성종 임금 때 세 분의 대비를 모시고자 창경궁을 창건한 이래 효종 임금 당시까지 대체로 임금과 왕비는 창덕궁에서, 대비는 창경궁에서 생활하는 체제가 일반적이었습니다. 이는 고대 중국의 궁궐 제도에서 대비를 동쪽에 모셨던 관습에서 동조(東朝)라고 하였는데, 창덕궁의 동쪽 창경궁을 만든 것도 같은 개념이었습니다. 조선 후기가 되면 우리식 궁궐 제도를 만들어 갑니다. 부모를 가까이서 모시고자 한 왕의 뜻에 따라 창덕궁 내에 별도의 대비전이 건립되며 그 시작이 효종대 입니다. 이후의 대비들은 창덕궁에서 국왕 왕비와 함께 생활하는 대가족 체제로 바뀌어가게 됩니다.
또한 수정당은 당시 왕대비가 생활하던 곳이어서 의미가 더 있었습니다. 앞서 효종 임금은 왕대비가 머물던 수정당이 비좁다는 이유를 들어 다시 만수전(萬壽殿)을 창건하여 왕대비를 옮겨 모십니다. 만수전은 이 후 숙종 임금 때 안타깝게 불에 타버리고 그 뒤 경종 임금 때 만수전 터에 있던 경복당(景福堂)을 경복전(景福殿)으로 편호(扁號)를 바꾸고 당시 왕대비(숙종 계비 인원왕후)를 모십니다. 그러다 정조대 왕대비가 처음 경복전에서 생활하다 정조 18년 당시 옮겨 생활하고 있었던 곳이 바로 수정당이었습니다.
효종대 이후로 창경궁 통명전은 보통 왕비나 대비들에게 존호 올리는 행사나 내진연(內進宴) 등 궁중 여인을 위한 장소로 변모 되었습니다. 정조대에 들어 왕대비에게 존호 올리는 장소를 간혹 처소인 창덕궁 경복전에서 치르기도 하였습니다. 경복전에서 통명전까지 거리가 있어 행사 때문에 옮기는 것이 수고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통명전이 정조 14년에 불에 타버리고, 중건은 순조대에야 이루어지 됩니다. 그래서 물색한 장소가 당시 왕대비의 처소인 수정당이었던 것입니다.
<동궐도>에 보면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없는 수정전 • 경복전 등 여러 대비전이 있었습니다. 수정전 현판은 창덕궁을 직접 방문하면서도 쉽게 느끼기 어려운 대비를 비롯한 왕실 가족이 함께 사는 공간이었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의미 있는 유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정조 19년 1월에 드디어 존호를 새긴 옥보 등을 올리게 됩니다. 왕대비에게는 ‘수경綏敬’, 장헌세자(사도세자, 장조 추존)에게는 ‘장륜융범 기명창휴章倫隆範 基命彰休’, 혜경궁에게 ‘휘목徽穆’이라는 존호를 더하여 올립니다. 이때의 옥보, 금인, 옥인 역시 지금까지 전해져 그 의미를 더합니다.
양웅열(유물과학과 학예연구사)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에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수정전(壽靜殿)’이라는 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현판 1점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테두리에 별도의 화려한 조각이나 채색 장식 없어 매우 소박해 보이는 현판이지만 현판이 걸린 건물은 몇 가지 면에서 의미 있었습니다. 수정전의 처음 이름은 ‘수정당(壽靜堂)’ 이었습니다. 수정전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 시기는 정조 18년(1794) 때입니다. 다음해인 정조 19년이 왕대비(영조계비 정순왕후)의 나이가 망륙(望六, 51세)이고 모후인 혜경궁(헌경왕후 추존)의 회갑이 되는 해여서 축하 행사를 준비하면서 옥보와 옥인 등 올리는 장소를 수정당으로 결정하였는데, 이 때 수정전으로 격을 높인 것입니다.
수정전으로 바뀐 수정당은 효종 임금 때 창경궁내 통명전(通明殿)에서 생활하던 왕대비(인조계비 장렬왕후)를 창덕궁 안으로 모시고자 고쳐 지은 건물입니다. 앞서 조선 초기 성종 임금 때 세 분의 대비를 모시고자 창경궁을 창건한 이래 효종 임금 당시까지 대체로 임금과 왕비는 창덕궁에서, 대비는 창경궁에서 생활하는 체제가 일반적이었습니다. 이는 고대 중국의 궁궐 제도에서 대비를 동쪽에 모셨던 관습에서 동조(東朝)라고 하였는데, 창덕궁의 동쪽 창경궁을 만든 것도 같은 개념이었습니다. 조선 후기가 되면 우리식 궁궐 제도를 만들어 갑니다. 부모를 가까이서 모시고자 한 왕의 뜻에 따라 창덕궁 내에 별도의 대비전이 건립되며 그 시작이 효종대 입니다. 이후의 대비들은 창덕궁에서 국왕 왕비와 함께 생활하는 대가족 체제로 바뀌어가게 됩니다.
효종대 이후로 창경궁 통명전은 보통 왕비나 대비들에게 존호 올리는 행사나 내진연(內進宴) 등 궁중 여인을 위한 장소로 변모 되었습니다. 정조대에 들어 왕대비에게 존호 올리는 장소를 간혹 처소인 창덕궁 경복전에서 치르기도 하였습니다. 경복전에서 통명전까지 거리가 있어 행사 때문에 옮기는 것이 수고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통명전이 정조 14년에 불에 타버리고, 중건은 순조대에야 이루어지 됩니다. 그래서 물색한 장소가 당시 왕대비의 처소인 수정당이었던 것입니다.
<동궐도>에 보면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없는 수정전 • 경복전 등 여러 대비전이 있었습니다. 수정전 현판은 창덕궁을 직접 방문하면서도 쉽게 느끼기 어려운 대비를 비롯한 왕실 가족이 함께 사는 공간이었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의미 있는 유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정조 19년 1월에 드디어 존호를 새긴 옥보 등을 올리게 됩니다. 왕대비에게는 ‘수경綏敬’, 장헌세자(사도세자, 장조 추존)에게는 ‘장륜융범 기명창휴章倫隆範 基命彰休’, 혜경궁에게 ‘휘목徽穆’이라는 존호를 더하여 올립니다. 이때의 옥보, 금인, 옥인 역시 지금까지 전해져 그 의미를 더합니다.
양웅열(유물과학과 학예연구사)<출처 : 국립고궁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