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관왕묘와 <무안왕묘비명>
종로에서 동대문을 지나면 동묘 앞이다. 지금은 중고 물품이 거래되는 황학동 벼룩시장으로 유명하지만, 이곳에는 동묘(東廟)라고 하는 사당이 있다. 동쪽에 있는 사당이라는 뜻으로, 관우의 사당을 가리킨다. 서울에는 동묘뿐 아니라 남묘(南廟), 서묘(西廟), 북묘(北廟) 등 여러 개의 관왕묘가 있었다. 남아 있는 관왕묘 중 가장 잘 보존된 것은 동묘지만, 서울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것은 남대문 밖의 남묘였다.
명나라 장병들이 의지했던 관우 신앙
1597년, 일본이 정유재란을 일으키자, 명나라는 원군을 보내 조선을 도왔다. 이때 조선에 온 유격장군(遊擊將軍) 진인(陳寅)은 울산 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한양으로 귀환했다. 진인은 자신이 탄환을 맞고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관우의 신령 덕분이라 여기고, 숭례문 밖 산기슭에 사당을 만들어 관우의 신상을 봉안했다. 이것이 남묘, 즉 남관왕묘의 시작이다.
당시 명나라에는 관우 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으므로, 마을마다 관우의 사당을 세우고, 집집마다 관우의 상을 모셔 제사를 지내는 것이 흔한 모습이었다. 조선에 온 명나라 장병들도 관우 신앙에 의지하고 있었기에 왜군과 싸워 이길 때마다 무신(武神) 관우가 도와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임진년과 정유년의 왜란에서 관성제군(관우)이 여러 차례 신령을 나타내시어 신병(神兵)을 보내 싸움을 도왔다.
명나라 장수와 병사들은 모두 말하기를, 평양성의 승리와 울산의 도산성 싸움, 삼로의 왜군을 물리친 싸움에서
매번 관성제군이 신령을 나타내어 도왔다고 하였다.
<해동성적지> 권1 묘사고 ‘남묘’
그러나 조선 조정의 관점은 이와 달랐다. 명나라 측에서 요청하여 관왕묘 건립에 물자와 인력을 보태기는 했지만, 관우의 신령이 나타났다는 소문은 허황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천 년 전에 죽은 관우가 군신이 되어 나타났다는 것은 공자(孔子)도 입에 담지 않은 괴이한 이야기[怪力亂神]에 불과했을 터이다.
그런데 정말 관우가 도운 것인지 관왕묘를 세우고 얼마 되지 않아 왜군이 철수하기 시작했다. 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왜란 내내 조선을 이끌었던 류성룡도 관왕묘의 신묘함에 대해 글을 남겼다.
(남관왕묘를 창건하고) 얼마 뒤 또 영남의 안동·성주 두 읍에 관왕묘를 건립하였는데…
오래지 않아 왜의 두목인 관백 평수길(平秀吉)이 죽자, 모든 왜군이 다 귀환하였으니,
이 역시 이치로써는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나, 어찌 우연한 일이라고만 하겠는가.
<서애집> 권16 잡저 ‘기관왕묘’, 한국고전번역원 번역
전쟁이 끝난 후에도 전국에 계속 관왕묘가 들어섰다. 하지만 조선 조정에서는 남관왕묘가 처음 세워졌을 때 선조가 참배한 것 외에는 관왕묘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조선 땅에 세워진 관왕묘는 이렇게 방치된 채, 100년의 세월을 보냈다.
왕권 강화를 위해 다시 찾은 관왕묘
관왕묘가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숙종 때부터였다. 당쟁이 극에 달했던 당시 숙종은 강력한 왕권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이때 발견한 것이 관우와 관왕묘였다. 한(漢)나라를 향한 충의와 절개의 상징이었던 관우는 신하들의 충성을 끌어내기 좋은 인물이었고, 약소국이었던 촉한을 중국의 정통 왕조라고 말하는 삼국지연의는 조선이 중화의 정통을 이었다고 하는 소중화(小中華) 사상을 뒷받침하기에 적합했다. 마침 삼국지연의가 유행하여 사람들에게 누구나 관우와 삼국지의 이야기를 알게 되던 때였다.
숙종은 선조 이후 처음으로 관왕묘를 참배하고, 각지의 관왕묘를 보수했다. 또한, 관우상을 보고 직접 글을 지어 남겼다. 숙종에 이어 영조와 사도세자, 정조 역시 관왕묘를 직접 참배하고 글을 남겼으며, 정조는 관왕묘 제사를 국가의 중요한 제사로 승격시켰다. 관왕묘와 관우를 통해 왕위의 정통성을 보이고 신하와 백성들의 충성을 얻고자 한 것이다.
1785년에 정조는 동관왕묘와 남관왕묘에 각각 두 개의 비석을 똑같이 세웠다. 이것이 사조어제무안왕묘비(四朝御製武安王廟碑)로서, 숙종 이후 네 임금이 지은 글을 새긴 무안왕(관우) 사당의 비석이라는 뜻이다. 하나의 비석에는 숙종과 영조가 직접 쓴 글이 새겨져 있고, 또 다른 비석에는 사도세자와 정조가 쓴 ‘무안왕묘비명(武安王廟碑銘)’이 앞뒤에 새겨져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에 소장 중인 ‘무안왕묘비명’은 남관왕묘에 세워진 어필 묘비 가운데 사도세자의 글을 탁본한 것이다. 사도세자는 이 글에서 관우의 업적을 칭송하고, 복을 내려주기를 기원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사도세자가 도원결의와 같이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도세자가 칭송한 관우는 단지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연의를 통해 미화되고 신격화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관왕묘는 고종 때까지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며 중요시했으나, 순종 때부터 제사가 철폐되었다. 남관왕묘는 1899년 2월 14일에 난 화재로 주요 전각들이 소실되었다가 곧 중건하였으나, 1913년에 일제가 ‘관성묘유지재단’이라는 단체에 관리를 넘겨주었다. 이후 6.25 전쟁을 겪으며 폐허가 됐다가 다시 1957년 재건했으나 본래의 모습을 잃은 상태였다. 1979년에는 처음 자리했던 남산 산기슭에서 동작구 사당동으로 이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남관왕묘에 있었던 어필 묘비는 전쟁 중에 소실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서울역사박물관의 ‘무안왕묘비명’ 탁본은 이제 실물을 확인할 수 없는 남관왕묘의 어필 묘비에서 탁본한 것으로 그 가치가 더욱 높다. 다행히도 동관왕묘에 세웠던 같은 내용의 비석이 온전히 남아있어 비교해 볼 수 있다.
<출처 : 서울역사박물관 '주요 유물 소개'>
남관왕묘와 <무안왕묘비명>
종로에서 동대문을 지나면 동묘 앞이다. 지금은 중고 물품이 거래되는 황학동 벼룩시장으로 유명하지만, 이곳에는 동묘(東廟)라고 하는 사당이 있다. 동쪽에 있는 사당이라는 뜻으로, 관우의 사당을 가리킨다. 서울에는 동묘뿐 아니라 남묘(南廟), 서묘(西廟), 북묘(北廟) 등 여러 개의 관왕묘가 있었다. 남아 있는 관왕묘 중 가장 잘 보존된 것은 동묘지만, 서울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것은 남대문 밖의 남묘였다.
명나라 장병들이 의지했던 관우 신앙
1597년, 일본이 정유재란을 일으키자, 명나라는 원군을 보내 조선을 도왔다. 이때 조선에 온 유격장군(遊擊將軍) 진인(陳寅)은 울산 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한양으로 귀환했다. 진인은 자신이 탄환을 맞고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관우의 신령 덕분이라 여기고, 숭례문 밖 산기슭에 사당을 만들어 관우의 신상을 봉안했다. 이것이 남묘, 즉 남관왕묘의 시작이다.
당시 명나라에는 관우 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으므로, 마을마다 관우의 사당을 세우고, 집집마다 관우의 상을 모셔 제사를 지내는 것이 흔한 모습이었다. 조선에 온 명나라 장병들도 관우 신앙에 의지하고 있었기에 왜군과 싸워 이길 때마다 무신(武神) 관우가 도와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임진년과 정유년의 왜란에서 관성제군(관우)이 여러 차례 신령을 나타내시어 신병(神兵)을 보내 싸움을 도왔다.
명나라 장수와 병사들은 모두 말하기를, 평양성의 승리와 울산의 도산성 싸움, 삼로의 왜군을 물리친 싸움에서
매번 관성제군이 신령을 나타내어 도왔다고 하였다.
<해동성적지> 권1 묘사고 ‘남묘’
그러나 조선 조정의 관점은 이와 달랐다. 명나라 측에서 요청하여 관왕묘 건립에 물자와 인력을 보태기는 했지만, 관우의 신령이 나타났다는 소문은 허황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천 년 전에 죽은 관우가 군신이 되어 나타났다는 것은 공자(孔子)도 입에 담지 않은 괴이한 이야기[怪力亂神]에 불과했을 터이다.
그런데 정말 관우가 도운 것인지 관왕묘를 세우고 얼마 되지 않아 왜군이 철수하기 시작했다. 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왜란 내내 조선을 이끌었던 류성룡도 관왕묘의 신묘함에 대해 글을 남겼다.
(남관왕묘를 창건하고) 얼마 뒤 또 영남의 안동·성주 두 읍에 관왕묘를 건립하였는데…
오래지 않아 왜의 두목인 관백 평수길(平秀吉)이 죽자, 모든 왜군이 다 귀환하였으니,
이 역시 이치로써는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나, 어찌 우연한 일이라고만 하겠는가.
<서애집> 권16 잡저 ‘기관왕묘’, 한국고전번역원 번역
전쟁이 끝난 후에도 전국에 계속 관왕묘가 들어섰다. 하지만 조선 조정에서는 남관왕묘가 처음 세워졌을 때 선조가 참배한 것 외에는 관왕묘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조선 땅에 세워진 관왕묘는 이렇게 방치된 채, 100년의 세월을 보냈다.
왕권 강화를 위해 다시 찾은 관왕묘
관왕묘가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숙종 때부터였다. 당쟁이 극에 달했던 당시 숙종은 강력한 왕권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이때 발견한 것이 관우와 관왕묘였다. 한(漢)나라를 향한 충의와 절개의 상징이었던 관우는 신하들의 충성을 끌어내기 좋은 인물이었고, 약소국이었던 촉한을 중국의 정통 왕조라고 말하는 삼국지연의는 조선이 중화의 정통을 이었다고 하는 소중화(小中華) 사상을 뒷받침하기에 적합했다. 마침 삼국지연의가 유행하여 사람들에게 누구나 관우와 삼국지의 이야기를 알게 되던 때였다.
숙종은 선조 이후 처음으로 관왕묘를 참배하고, 각지의 관왕묘를 보수했다. 또한, 관우상을 보고 직접 글을 지어 남겼다. 숙종에 이어 영조와 사도세자, 정조 역시 관왕묘를 직접 참배하고 글을 남겼으며, 정조는 관왕묘 제사를 국가의 중요한 제사로 승격시켰다. 관왕묘와 관우를 통해 왕위의 정통성을 보이고 신하와 백성들의 충성을 얻고자 한 것이다.
1785년에 정조는 동관왕묘와 남관왕묘에 각각 두 개의 비석을 똑같이 세웠다. 이것이 사조어제무안왕묘비(四朝御製武安王廟碑)로서, 숙종 이후 네 임금이 지은 글을 새긴 무안왕(관우) 사당의 비석이라는 뜻이다. 하나의 비석에는 숙종과 영조가 직접 쓴 글이 새겨져 있고, 또 다른 비석에는 사도세자와 정조가 쓴 ‘무안왕묘비명(武安王廟碑銘)’이 앞뒤에 새겨져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에 소장 중인 ‘무안왕묘비명’은 남관왕묘에 세워진 어필 묘비 가운데 사도세자의 글을 탁본한 것이다. 사도세자는 이 글에서 관우의 업적을 칭송하고, 복을 내려주기를 기원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사도세자가 도원결의와 같이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도세자가 칭송한 관우는 단지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연의를 통해 미화되고 신격화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관왕묘는 고종 때까지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며 중요시했으나, 순종 때부터 제사가 철폐되었다. 남관왕묘는 1899년 2월 14일에 난 화재로 주요 전각들이 소실되었다가 곧 중건하였으나, 1913년에 일제가 ‘관성묘유지재단’이라는 단체에 관리를 넘겨주었다. 이후 6.25 전쟁을 겪으며 폐허가 됐다가 다시 1957년 재건했으나 본래의 모습을 잃은 상태였다. 1979년에는 처음 자리했던 남산 산기슭에서 동작구 사당동으로 이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남관왕묘에 있었던 어필 묘비는 전쟁 중에 소실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서울역사박물관의 ‘무안왕묘비명’ 탁본은 이제 실물을 확인할 수 없는 남관왕묘의 어필 묘비에서 탁본한 것으로 그 가치가 더욱 높다. 다행히도 동관왕묘에 세웠던 같은 내용의 비석이 온전히 남아있어 비교해 볼 수 있다.
<출처 : 서울역사박물관 '주요 유물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