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유물] 내시의 가족, 내시 족보

otimetour
2024-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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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물정보1659년 나업 처 한씨 분재기(2017년 구입유물)
    내시 족보(2017년 구입유물)




조선시대 가족의 모습이라고 하면 흔히 부계 성씨를 중심으로 이어지는 양반 사대부가의 모습을 전형적으로 떠올리고, 그것을 우리의 전통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전통이라는 것이 대부분 그렇게 오래된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것이 아니며, 전형적이라는 말 뒤에 많은 예외들이 숨겨져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더구나 양반 아닌 사람들이 더 많이 살았던 조선시대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양한 삶의 모습이 있었으리라 보는 것이 무리는 아닐 것이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1659년 나업 처 한씨 분재기’와 ‘내시 족보’는 그처럼 조선시대의 전형에서 벗어난 내시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는 좋은 유물이다.

 

 

내시(內侍)는 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관원으로서 궁궐 안에서 왕의 수라와 왕명의 전달, 수문(守門), 청소와 같은 일을 담당하였다. 내시는 수염이 없다거나 남성적이지 않은 외모적 특징이 부각되어 사람들에게 친숙하게 알려졌다. 그러나 오늘날 전해져 오는 내시에 관한 기록이나 유물이 비교적 많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내시에 대해 모르거나 오해하고 있는 점들이 많다.

 

내명부의 궁녀가 내시와 자주 비교되기도 하는데, 평생 혼인할 수 없었던 궁녀와 달리 많은 내시들은 궁궐 밖에 살면서 여성과 혼인하여 가족을 이루었다. 내시가 혼인했다는 사실이 낯설 수도 있으나, 내시는 혼인 뿐 아니라 자녀를 길러 대를 잇고 가문을 계승하기도 하였다. 다만 자녀를 생산할 수 없었기에 역시 남성의 기능을 잃은 아이들을 양자로 들여 양육하였고, 이들이 장성하여 내시부의 관원이 되었다.

 

 

 

내시 나업의 일생

 

최언순(崔彦恂)과 나업(羅嶪)은 왜란과 호란으로 어지럽던 조선 후기의 이름난 내시들이다. 최언순은 임진왜란 때 의주까지 피난한 선조를 호종하여 그 공로로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올랐고, 그의 양자인 나업은 병자호란 이후 조선을 압박하는 청과의 외교에서 여러 차례 활약한 인물이다.

 

나업은 1596년 부친 나언기(羅彦紀)와 모친 평산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연하겠지만 그의 생부는 내시가 아니었다. 나업이 남성을 잃은 경위를 알 수는 없지만 다른 내시들처럼 선천적이었거나 또는 사고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자가 된 나업은 가족의 곁을 떠나 내시 최언순의 양자가 되었다. 17세에 벼슬길에 들어선 나업은 25세에 승전색(承傳色)이 되었다. 승전색은 왕명을 전달하는 직임으로서 내시 가운데 능력이 뛰어난 자를 선발하였으므로 나업이 일찍이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다.

 

1635년 인조(仁祖)의 비 인열왕후(仁烈王后)가 승하하여 장릉에 안장되자 나업은 시릉관(侍陵官)이 되어 3년 동안 능을 살폈다. 나업은 이 때의 공으로 노비 4구와 30결의 넓은 토지를 상으로 받았다. 그 후 인조가 승하하였을 때 나업은 왕을 호위하는 무예별감을 거느리고 인조의 침전을 지켜 왕과 왕비의 마지막 길에 모두 함께 하였다.

 

 

내시 가족의 족보

 

나업은 첨사 한기(韓紀)의 딸인 청주한씨와 혼인하였다. 나업과 한씨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기에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네 명의 고자 아이들을 양자로 들여 키웠는데 이들의 이름은 남궁식(南宮栻), 정역(鄭櫟), 문철(文㯙), 주빈(朱彬)이었다. 아버지와 성이 다른 이 네 명의 양자들은 나업의 족보에 엄연히 올라와 있다. 사실 이 내시 집안의 족보는 대부분 성이 다른 아버지와 양자들로 이어지고 있으므로 당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위화감을 준다.

 

 

 

한씨의 분재기

 

나업과 한씨가 네 명의 양자를 어떻게 생각하였을지 가늠할 수는 없지만 한씨가 남긴 상속문서인 분재기에는 남들과 다르지 않은 부모의 마음이 담겨져 있다. 나업이 세상을 떠난 5년 뒤인 1659년 겨울, 한씨는 양자들을 집으로 불러 모았다. 세 명의 양자와 그 사이 유명을 달리한 첫째 양자 남궁식을 대신해서 그의 양자, 즉 나업의 양손자인 김두상이 자리하였다. 한씨는 이들에게 나업이 생전에 상으로 받았던 토지를 고루 나누어주고 다음과 같이 분재기를 작성하였다.

 

 

양자 사형제들에게 (재산을) 균등하게 나누어 주는 문서
 

"역적 집안에서 몰수한 전답이 황해도 봉산 서남면에 있는데, 이 전답은 돌아가신 너희 아버지께서 장릉을 관리한 공으로 (왕의) 수교에 따라 법전에 의거하여 내려 받은 것이다. 지금까지 농사지어 살아왔으나 (이제) 양자들에게 몫을 고루 나누어주고 각각 문서를 작성하여 주니 나중에 자손들 가운데 누군가 만일 허튼 소리를 하거든 이 문서를 가지고 법에 따라 관에 알려 바로잡도록 해라."

 

 

셋째 문철이 붓을 잡고 어머니 한씨의 뜻을 글로 옮겼다. 문서에는 각 양자들의 몫으로 주는 토지의 내역을 세세하게 기록하였다. 작성을 마치자 한씨는 ‘나업처 정경부인 한씨’라고 새겨진 인장을 찍었고, 세 명의 양자와 한 명의 손자는 각기 자기 이름 아래 두 가지 서명을 하여 문서를 완성하였다. 이들은 같은 내용으로 네 장의 문서를 만들어 나누어 가졌다.

 

우리는 보통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이 전통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하지만, 수백 년 전 작성된 이 문서를 보면 전혀 다른 형태의 가족이 조선시대에도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교 가부장 사회에서 남성성이 결여된 아버지가 있었고, 부모형제와 어떤 혈연으로도 이어지지 않은 성이 다른 양자들이 있었다. 혼인하여 자식을 생산하고 양육하는 것이 여성의 가장 중요한 역할로 여겨지던 시대에 제 핏줄이 아닌 자식들을 거두어 키워야 했던 어머니가 있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여느 집처럼 가족을 이루고 재산을 상속하였으며, 나름의 족보를 만들어 남겼다. 전통 가족의 해체라는 말이 들려오는 요즘 이 유물들을 보면 무엇이 전통인지 또는 전통적인 가족의 모습인지 한 번쯤 생각해 보게 된다.

 


남편을 위해 남긴 한씨의 발원문

 

남들 같지 않은 남편과 살다 간 부인 한씨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최근 속초의 보광사에 소장된 나무불상[목조지장보살좌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불상 안에 들어있던 발원문을 통해 불상의 조성 경위가 밝혀진 일이 있었다. 이 불상은 남편이 죽은 후 홀로 남은 부인이 남편의 극락왕생을 빌기 위해 시주하여 만든 것이었는데, 남편은 바로 내시 나업이었고, 시주자는 그 부인 한씨였다. 오랜 세월을 거쳐 불상 밖으로 나온 발원문에는 다른 세상에서도 다시 남편과 함께하고 싶었던 한씨의 바람이 담겨져 있어 이 특별한 부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려볼 수 있게 한다.

 

"불상대시주 한씨는 남편 숭록대부 나업이 극락에 환생하여 함께 아미타불을 뵈옵기를 삼가 바랍니다."


<출처 : 서울역사박물관 '주요 유물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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