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유물] 녹봉을 받으러 갑니다

otimetour
2024-08-23
조회수 261
  • 유물정보   서15142 이담명 호노 막동쇠 입안(세로 43.9cm 가로 50cm)


서15142


이 문서는 숙종 15년인 1689년에 노비 막동쇠가 이조로부터 발급받은 입안입니다. 막동쇠는 자신의 상전인 도승지 이담명의 여름 녹봉을 받기 위해 이조에 증빙을 요청하는 소지를 올렸고, 그에 따라 이조에서는 공증서인 입안을 발급해 주었습니다. 짧은 내용의 문서이지만 이 문서를 통해 조선시대 사람들의 생활 모습과 당시의 문서에 사용된 우리말인 이두, 조선시대 사람들의 서명 등 다양한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청원문서인 소지와 공증문서인 입안

 

 

이 문서는 ‘소지(所志)’와 ‘입안(立案)’이 함께 기록된 문서입니다. 우측의 작은 글씨로 기록된 부분은 청원자인 막동쇠가 올린 소지이고, 좌측의 비교적 큰 글씨로 작성한 부분이 이조에서 작성하여 발급한 입안입니다. 소지는 조선시대에 백성이 관에 올린 문서로서 주로 어떤 사안을 청원하거나, 타인과의 소송에 대한 진술을 목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관에서는 소지의 청원 내용이 타당할 경우에 입안이라고 하는 공증문서를 별도로 발급하였습니다. 증빙하는 내용이나 절차가 간단할 경우는 따로 문서를 작성하지 않고, 소지의 빈 칸에 관의 공증 내용을 기록하여 그대로 내어주었는데 이러한 문서는 ‘입지(立旨)’라고 합니다. 이 문서는 입지와 같이 본래의 소지에 그대로 증빙 내용을 기재하여 내어주었으나 입안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므로 입안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한자로 표현한 우리말, 이두

 

문서의 제일 우측 하단에 적혀있는 ‘莫同金’은 문서의 작성자인 막동쇠를 뜻하는 글자입니다. ‘金’이라고 쓰여져 있는 것은 뜻[訓]인 ‘쇠’로 읽었을 것입니다. 한자를 이용해 우리말을 표기하는 이두(吏讀)에 의하면 ‘金’을 보통 ‘쇠’라고 읽습니다. 흔히 알려져 있는 이름인 돌쇠는 이두로 ‘乭金’이라고 표기하였습니다. 돌 석(石)자 밑에 한글의 ‘ㄹ’과 비슷한 새 을(乙)자를 붙여서 ‘돌’이라고 읽고, ‘金’을 뜻에 따라 ‘쇠’라고 읽으면 ‘乭金’이 ‘돌쇠’가 됩니다. 이미 한글이 창제되어 사용되고 있었지만, 한자로 문서를 작성할 때는 이렇게 이두가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이 문서에서도 이름 뿐 아니라 여러 조사나 서술어에 이두가 사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노비의 서명 방법

 

막동쇠의 이름 아래에 사다리 모양으로 그려져 있는 것은 수촌(手寸)이라는 서명 방식입니다. 문서를 작성할 때 양반은 보통 자신의 이름을 변형하여 서명을 하였고, 여인들은 인장을 찍거나 손바닥[手掌]을 그려 넣었습니다. 노비나 일부 평민들은 수장 외에 문서 위에 손가락을 대고 붓으로 손마디를 표시하기도 했는데 이것을 수촌이라고 합니다. 왼손가락을 그리면 좌촌(左寸)이고, 오른손가락을 그리면 우촌(右寸)입니다. 막동쇠의 수촌 안에는 ‘좌촌’이라고 쓰여져 있으니 자신의 왼손가락을 문서에 대고 그렸을 것입니다.

 

문서의 중간과 왼쪽 상단, 그리고 왼쪽 아래에는 이조 관원의 서명도 있습니다. 큰 글씨로 ‘당상(堂上)’이라고 쓰고, 그 아래에 쓴 글자가 바로 ‘서압(署押)’이라고 하는 관원의 서명입니다. 왼쪽 하단에 ‘낭청(郎廳)’이라고 쓴 아래에도 서명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노비가 올린 소지는 누가 작성하였나

 

이 소지를 이조에 올린 사람은 이담명의 호노(戶奴)인 막동쇠(莫同金)입니다. 막동쇠의 이름 위에는 ‘행도승지 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사람이 노비 막동쇠의 주인으로서 숙종 때 승지와 경상도 관찰사 등의 관직을 지낸 이담명입니다. 이름이 없는 것은 문서를 발급 받은 후에 막동쇠 또는 그 자손들이 이담명의 이름을 그대로 쓰는 것을 꺼려서 일부러 지웠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호노(戶奴)는 집안의 대소사를 처리하는 노비로서 일반적인 노비들보다는 지위가 높은 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호노의 경우 노비라고 해도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경우가 종종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서도 이담명의 호노인 막동쇠가 작성한 것일까요?

문서를 잘 살펴보면 조금 이상한 점이 눈에 띕니다. 청원서인 소지의 필체와 관의 공증인 입안의 필체가 매우 유사해 보입니다. 이조를 뜻하는 ‘조(曺)’자나 중국연호인 ‘강희(康熙)’, 숫자 ‘육(六)’ 등을 살펴보면 마치 한 사람이 쓴 것처럼 매우 유사합니다. 소지는 막동쇠가 작성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입안은 이조의 관원 또는 서리가 작성하였을 것인데 이상한 일입니다.

 

만약 소지와 입안의 필체가 같다고 본다면, 문서의 작성자는 막동쇠가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추측을 해보면 막동쇠가 이조에 가서 구두로 청원을 하자, 이조의 관원이나 서리가 이 내용을 문서(소지)로 작성하여 주고, 다시 이조의 입안까지 추가로 작성하여 막동쇠에게 발급해준 것으로 보입니다. 청원자가 작성해야 할 문서를 대신 작성해준 것은 매우 친절한 일로 보이는데, 막동쇠의 주인인 이담명이 요직인 승정원의 도승지로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본래 별도의 문서로 작성되는 소지와 입안이 하나의 문서 안에 함께 작성된 것도 바로 이조에서 모두 작성하였다고 보면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녹봉을 받기 위해 필요한 증명서

 

행도승지 이(담명)의 호노 막동쇠

아룁니다. 제 상전의 교지(敎旨 : 임명문서)를 고향집에 두고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이번 여름 분의 녹봉을 받을 수 있도록 이조에 보관되어 있는 비초(批草 : 이담명을 왕이 임명한 내용이 담긴 기록)를 확인하여 입지를 발급하도록 분부를 내려주십시오.

 

막동쇠가 올린 소지의 내용은 대략 위와 같습니다. 이 문서를 작성할 당시에는 매 계절마다 관리에게 녹봉을 지급하였습니다. 녹봉을 받을 관리는 임명장인 교지와 녹패(祿牌)라고 하는 문서를 지참하고 광흥창에 가면 쌀과 콩 등으로 구성된 녹봉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막동쇠의 상전인 이담명도 녹봉을 받아야 했으나, 도승지로 임명받을 때 받은 임명장인 ‘교지(敎旨)’를 고향 집에 두고 왔으므로 그 대신 이조의 임명 기록을 확인하여 증빙 해달라고 청원한 것입니다. 이담명은 1689년 5월에 도승지에 임명되었는데 관직에 부임하러 서울로 올라면서 임명장인 교지를 칠곡의 고향집에 두고 온 모양입니다.

 

이조에서는 국왕의 하비(下批) 기록을 확인하여 같은 해 5월 22일에 이담명을 도승지로 임명한 사실이 있음을 증빙하여 주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1689년 5월 22일에 이담명이 도승지에 임명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막동쇠는 이제 교지를 대신할 이조의 입안과 녹패를 들고 마포에 있는 광흥창(廣興倉)에 가서 상전의 녹봉을 무사히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출처 : 서울역사박물관 '주요 유물 소개'>

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