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큐레이터 추천 소장품 <홍무예제>

김효순
2024-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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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터 추천 소장품



허목 초상–함부로 기뻐하거나 화내지 마라

『홍무예제』의 편찬 배경과 구성

『홍무예제』는 1381년(홍무 14) 중국 명나라에서 국가의 예법(禮法)을 기록해 편찬한 책입니다. 이 책에는 중앙과 지방에서 준수해야 할 국가의 각종 의식, 복식과 품계, 공문서 양식 등이 실려 있습니다.

『홍무예제』의 편찬 배경은 14세기 후반 중국의 왕조 교체와 관련이 있습니다. 1368년 중국의 주원장(朱元璋, 홍무제)은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를 밀어내고 명나라를 건국합니다. 명나라는 원나라로부터 억압받던 한족의 문화를 다시 일으키고 국가 통치 규범을 확립하기 위해 ‘예제’를 정비했으며 『예의정식(禮儀定式)』, 『대명집례(大明集禮)』, 『홍무예제』 등 예법을 기록한 책들을 편찬했습니다.

『홍무예제』는 국가나 황제에게 경사가 있을 때의 의식[進賀禮儀], 사신이 오갈 때의 의식 [出使禮儀], 관리의 복식과 품계[服色‧文武階勳], 공문서 서식[署押體式], 녹봉 관련 규정[官吏俸給] 등 모두 11개 항목으로 구성되었는데 자세한 내용은 <표 1>과 같습니다.


『홍무예제』, 조선 전기(추정), 28.8×19.0cm, 보물, 2003년 송성문 기증, 증3471

『홍무예제』, 조선 전기(추정), 28.8×19.0cm, 보물, 2003년 송성문 기증, 증3471

<표1> 『홍무예제』 의 구성과 내용

구분내용
1진하례의(進賀禮議)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신료들이 이를 축하하는 의식
2출사례의(出使禮議)황제가 내린 명령이나 이를 받든 사신을 영접하는 의식
3제사예식(祭祀禮式)제사를 드릴 때의 의식
4복색(服色)관원의 등급에 따라 관복의 색을 구분한 규정
5문무계훈(文武階勳)문관과 무관의 품계와 관련한 규정
6급수문직산관정식
(給守文職散官定式)
관원의 자격을 고려하여 임무와 품계를 주는 규정
7이원자격(吏員資格)관청에 소속된 아전[吏員] 관련 규정
8주본격식(奏本格式)관청에서 황제에게 아뢰는 문서의 격식
9행이체식(行移體式)관청마다 공문을 보내는 12가지 문서 양식
10서압체식(署押體式)공문을 발급할 때 관인(官印)을 찍거나 수결(手決)하는 격식
11관리봉록(官吏俸祿)관원과 아전의 봉급에 관한 규정
『홍무예제』의 전래와 준용

조선왕조는 ‘유교식 국가 전례’를 구현하고, 국가의 통치 규범을 확립하며, 중국과 외교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홍무예제』를 준용(準用)했습니다. 1381년 중국에서 편찬된 『홍무예제』가 우리나라에 언제 전해졌는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홍무예제』가 편찬되고 19년이 지난 1400년(정종 2)에 이르러 『조선왕조실록』에 그 이름이 등장하고 국가의 예법을 관장하는 예조(禮曹)에서 이 책을 표준으로 청할 만큼 널리 알려졌습니다.
태종(太宗, 재위 1400~1418) 연간에는 『홍무예제』 준용에 대한 여러 논의가 이루어졌습니다. 1408년(태종 8) 임금의 장인 민제(閔霽)가 세상을 뜨자, 태종의 비 원경왕후(元敬王后, 1365~1420)의 상복(喪服) 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출가한 딸이 부모를 위해 상복을 입은 전례가 없었는데, 예조는 『홍무예제』의 “출가한 딸은 본래 부모를 위해 1년간 상복을 입는다”는 내용을 따르자고 청했습니다. 태종은 이를 윤허했고 민간에서도 이를 따르도록 했습니다. 또한 1412년(태종 12)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에 사용되는 신주(神主)를 만들 때와 1416년(태종 16) 조정 관리들이 입는 관복 제도를 개편할 때에도 모두 『홍무예제』를 따르도록 했습니다.
조선왕조는 『홍무예제』를 수용하되 당시 현실에 맞게 적용하려 노력했습니다. 『홍무예제』의 공문서 관련 사항을 다룬 「행이체식」에서는 다른 관청으로 문서를 보낼 때, 서로 존대한다는 의미에서 ‘신(申)’이라는 글자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임금과 신하 사이에서만 ‘신’이라는 글자를 사용했기에 대신들은 이를 다른 글자로 바꾸자고 청했습니다. 이에 따라 지방에서 중앙으로 올리는 문서를 가리키는 ‘신문(申聞)’을 ‘계문(啓聞)’으로,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는 관원을 가리키는 ‘지신사(知申事)’를 ‘도승지(都承旨)’로 바꾸었습니다. 세종대에 『홍무예제』가 명나라의 지방에서 적용하는 제도라는 점에서 조선시대 국가 의례의 표준으로 삼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이 대두하며 그 영향력이 점점 줄어들었지만, 15세기 후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편찬할 때 주요 참고 서적으로 활용되었습니다.

『홍무예제』의 가치와 의의

1책 87면으로 이루어진 『홍무예제』(증3471)는 국내 유일본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특히 조선 전기에 우리나라에서 목판에 새긴 뒤 다시 인쇄한 책이어서, 당시 인쇄술의 수준을 알려주는 소중한 자료입니다.
『홍무예제』는 15세기 전반 우리나라와 중국의 외교 절차와 국가의 문서 체계 정비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가치를 인정받아 1991년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또한 『홍무예제』는 지난 2003년 혜전(惠田) 송성문(宋成文, 1931~2011) 선생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문화재’라는 점에서 더욱 뜻깊은 의의를 지닙니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김경록, 「明初 洪武帝의 國家統治 구상과 『大明律』」, 『法史學硏究』 제53호(2016)
김문식, 「조선시대 國家典禮書의 편찬 양상」, 『장서각』 제21호(2009)
김해영, 「조선 초기 禮制 연구와 『國朝五禮儀』의 편찬」, 『朝鮮時代史學報』(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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