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응 초상>은 조선말기 사대부 초상화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특히 한 사람의 주인공을 여러 가지 형식의 초상화로 제작하였는데, 2본의 금관조복본(金冠朝服本), 흑단령포본(黑團領袍本), 와룡관학창의본(臥龍冠鶴氅衣本), 흑건청포본(黑巾靑袍本), 복건심의본(袱巾深衣本) 등과 여러 점의 사진까지 남아 있어, 관련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1. <이하응 초상>, 덕수 1938, 조선 1869년경 168.5×77.0(전체), 132.0×67.9㎝(그림), 보물2. 이하응, <묵란도>, 본관 5122, 조선 19세기, 172×30.5㎝
왕의 아버지, 묵란(墨蘭)의 대가
흥선대원군 이하응(興宣大院君 李昰應, 1820~1898)은 조선 26대 왕인 고종(高宗, 재위 1863~1907)의 친아버지입니다. ‘대원군(大院君)’이라는 칭호는 조선시대에 왕이 후사(後嗣) 없이 죽어 종친 가운데서 왕위를 계승하는 경우, 새로운 왕의 생부(生父)를 일컫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는 모두 4명의 대원군이 있었는데 흥선대원군 이하응만이 생전에 대원군이라는 칭호를 받았고, 나머지 3명은 사후에 추존(追尊) 되었습니다.
고종이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면서 흥선대원군은 10여 년 동안 권세를 누리며 정치, 경제, 사회, 종교, 외교뿐만 아니라 예술계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는 서화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고, 글씨와 묵란(墨蘭)에는 탁월한 솜씨를 발휘하여 일가(一家)를 이루었습니다.
당대 최고 초상화가의 작품
1. <이하응 초상>, 보물
2. 172.0×75.9㎝(전체), 130.8×66.2㎝(그림)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흥선대원군과 운현궁 사람들』, 서울역사박물관, 2007. p.12)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하응 초상>은 보물(옛 지정번호 보물 제1499-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화면에 주인공이나 작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이를 추정 할 수 있는 단서를 서울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하응 초상>(금관조복본)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두 작품은 모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금관조복을 입은 모습을 그렸는데, 극히 일부분을 제외하고 도상, 양식, 기법 등이 거의 동일합니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금관조복본의 오른쪽 상단에는 이하응이 직접 쓴 것으로 보이는 묵서가 있습니다.
내가 50세 되던 기사년 초여름에 스스로 제하다.
화사 이한철·유숙, 장황 한홍적
余年五十己巳肇夏自題 畵士 李漢喆 劉淑 粧䌙 韓弘迪
이 구절로 볼 때, <이하응 초상>(금관조복본) 서울역사박물관 소장본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은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 가운데 한 사람인 이한철(李漢喆, 1812~1893이후), 유숙(劉淑, 1827~1873)의 합작품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전통의 계승, 시대의 반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하응 초상>은 17~18세기 조선시대 초상화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19세기 말의 새로워진 초상화의 변모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조선 중기 공신 초상화와 후기의 사대부 초상화의 양식을 그대로 반영하여, 주인공의 왼쪽 얼굴 면을 3/4쯤 보여주면서, 대폭의 화면에 주인공의 전신상을 의자에 앉은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의자에는 표피(豹皮)를 깔고, 손은 소매 안에서 맞잡아 보이지 않으며, 두 발은 발 받침대 위에 나란히 올려놓고, 바닥에는 화문석을 깔았습니다.
하지만 주인공의 얼굴묘사는 당시의 화풍을 반영하듯이 전대보다 훨씬 강하게 강조되었습니다. 17세기의 초상화가 이목구비의 형태만을 묘사하고 음영은 거의 생략하였다면, 18세기의 초상화는 세필로 얼굴의 살결[肉理文]을 묘사하여 입체감을 나타내고, <이하응 초상>은 눈에는 잘 보이지 않을 정도의 미세한 붓질로 음영을 더욱 적극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또한 조선 중기 공신 초상화에서 주로 그려지는 흑단령(黑團領)은 관청에서 입는 평상복이었고, 후기 사대부 초상화에서 표현된 심의(深衣)는 가내(家內)에서 입는 평상복이었습니다. 하지만 <이하응 초상>에서 이하응이 입고 있는 금관조복은 명절이나 큰 행사 때 입는, 격식을 갖춘 가장 화려한 옷입니다. 금관조복이라는 옷을 입은 모습을 그리면서 이전보다 훨씬 화려한 초상화가 제작되었습니다. 특히 금관의 금속성과 화려한 문양, 선홍색(鮮紅色)과 군청색(群靑色)의 조화와 화려한 화문석은 전대에서는 볼 수 없었습니다.
일반 사대부들은 그릴 수 없었던 여러 형식의 초상화
<이하응 초상> 얼굴 부분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이하응 초상>은 금관조복을 입은 모습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복식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진 초상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초상화 중에서 한 본(本)의 초상화를 동시에 두 벌 그리거나, 여러 번 그리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이처럼 한 사람의 초상화를 다양한 형식으로 그린 예는 거의 없었습니다. 왕의 초상화인 어진의 경우에는 여러 본이 그려졌다는 기록이 있지만, 현재 남아 있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비록 <이하응 초상> 일괄은 얼굴과 자세는 거의 비슷하지만, 옷과 각종 기물, 바닥 등을 바꿔서 여러 본을 제작하였습니다. 위의 총 6본의 초상화 중에서 <금관조복본>, <흑단령포본>, <와룡관학창의본>은 50세, <흑건청포본>, <복건심의본>은 61세에 그려진 것을 화제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여러 본의 초상화를 그렸을까요? 다른 초상화 이모본의 경우처럼 이전에 그려진 본을 그대로 모사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식으로 초상화를 그림으로써 어쩌면 왕만이 그릴 수 있었던 다양한 형식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자신의 위세를 드러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짐작해 봅니다.
<이하응 초상> 흑단령포본, 와룡관학창의본, 흑건청포본, 복건심의본, 보물, 170.2×77.1㎝(전체), 172.0×75.9㎝(전체), 169.9×77.4㎝(전체), 170.5×75.0㎝(전체), 153.2×75.7㎝(전체)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흥선대원군과 운현궁 사람들』, 서울역사박물관, 2007. p.16~31.)
큐레이터 추천 소장품
<이하응 초상>은 조선말기 사대부 초상화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특히 한 사람의 주인공을 여러 가지 형식의 초상화로 제작하였는데, 2본의 금관조복본(金冠朝服本), 흑단령포본(黑團領袍本), 와룡관학창의본(臥龍冠鶴氅衣本), 흑건청포본(黑巾靑袍本), 복건심의본(袱巾深衣本) 등과 여러 점의 사진까지 남아 있어, 관련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1. <이하응 초상>, 덕수 1938, 조선 1869년경 168.5×77.0(전체), 132.0×67.9㎝(그림), 보물2. 이하응, <묵란도>, 본관 5122, 조선 19세기, 172×30.5㎝
왕의 아버지, 묵란(墨蘭)의 대가
흥선대원군 이하응(興宣大院君 李昰應, 1820~1898)은 조선 26대 왕인 고종(高宗, 재위 1863~1907)의 친아버지입니다. ‘대원군(大院君)’이라는 칭호는 조선시대에 왕이 후사(後嗣) 없이 죽어 종친 가운데서 왕위를 계승하는 경우, 새로운 왕의 생부(生父)를 일컫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는 모두 4명의 대원군이 있었는데 흥선대원군 이하응만이 생전에 대원군이라는 칭호를 받았고, 나머지 3명은 사후에 추존(追尊) 되었습니다.
고종이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면서 흥선대원군은 10여 년 동안 권세를 누리며 정치, 경제, 사회, 종교, 외교뿐만 아니라 예술계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는 서화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고, 글씨와 묵란(墨蘭)에는 탁월한 솜씨를 발휘하여 일가(一家)를 이루었습니다.
당대 최고 초상화가의 작품
2. 172.0×75.9㎝(전체), 130.8×66.2㎝(그림)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흥선대원군과 운현궁 사람들』, 서울역사박물관, 2007. p.12)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하응 초상>은 보물(옛 지정번호 보물 제1499-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화면에 주인공이나 작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이를 추정 할 수 있는 단서를 서울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하응 초상>(금관조복본)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두 작품은 모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금관조복을 입은 모습을 그렸는데, 극히 일부분을 제외하고 도상, 양식, 기법 등이 거의 동일합니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금관조복본의 오른쪽 상단에는 이하응이 직접 쓴 것으로 보이는 묵서가 있습니다.
내가 50세 되던 기사년 초여름에 스스로 제하다.
화사 이한철·유숙, 장황 한홍적
余年五十己巳肇夏自題 畵士 李漢喆 劉淑 粧䌙 韓弘迪
이 구절로 볼 때, <이하응 초상>(금관조복본) 서울역사박물관 소장본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은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 가운데 한 사람인 이한철(李漢喆, 1812~1893이후), 유숙(劉淑, 1827~1873)의 합작품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전통의 계승, 시대의 반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하응 초상>은 17~18세기 조선시대 초상화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19세기 말의 새로워진 초상화의 변모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조선 중기 공신 초상화와 후기의 사대부 초상화의 양식을 그대로 반영하여, 주인공의 왼쪽 얼굴 면을 3/4쯤 보여주면서, 대폭의 화면에 주인공의 전신상을 의자에 앉은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의자에는 표피(豹皮)를 깔고, 손은 소매 안에서 맞잡아 보이지 않으며, 두 발은 발 받침대 위에 나란히 올려놓고, 바닥에는 화문석을 깔았습니다.
하지만 주인공의 얼굴묘사는 당시의 화풍을 반영하듯이 전대보다 훨씬 강하게 강조되었습니다. 17세기의 초상화가 이목구비의 형태만을 묘사하고 음영은 거의 생략하였다면, 18세기의 초상화는 세필로 얼굴의 살결[肉理文]을 묘사하여 입체감을 나타내고, <이하응 초상>은 눈에는 잘 보이지 않을 정도의 미세한 붓질로 음영을 더욱 적극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또한 조선 중기 공신 초상화에서 주로 그려지는 흑단령(黑團領)은 관청에서 입는 평상복이었고, 후기 사대부 초상화에서 표현된 심의(深衣)는 가내(家內)에서 입는 평상복이었습니다. 하지만 <이하응 초상>에서 이하응이 입고 있는 금관조복은 명절이나 큰 행사 때 입는, 격식을 갖춘 가장 화려한 옷입니다. 금관조복이라는 옷을 입은 모습을 그리면서 이전보다 훨씬 화려한 초상화가 제작되었습니다. 특히 금관의 금속성과 화려한 문양, 선홍색(鮮紅色)과 군청색(群靑色)의 조화와 화려한 화문석은 전대에서는 볼 수 없었습니다.
일반 사대부들은 그릴 수 없었던 여러 형식의 초상화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이하응 초상>은 금관조복을 입은 모습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복식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진 초상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초상화 중에서 한 본(本)의 초상화를 동시에 두 벌 그리거나, 여러 번 그리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이처럼 한 사람의 초상화를 다양한 형식으로 그린 예는 거의 없었습니다. 왕의 초상화인 어진의 경우에는 여러 본이 그려졌다는 기록이 있지만, 현재 남아 있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비록 <이하응 초상> 일괄은 얼굴과 자세는 거의 비슷하지만, 옷과 각종 기물, 바닥 등을 바꿔서 여러 본을 제작하였습니다. 위의 총 6본의 초상화 중에서 <금관조복본>, <흑단령포본>, <와룡관학창의본>은 50세, <흑건청포본>, <복건심의본>은 61세에 그려진 것을 화제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여러 본의 초상화를 그렸을까요? 다른 초상화 이모본의 경우처럼 이전에 그려진 본을 그대로 모사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식으로 초상화를 그림으로써 어쩌면 왕만이 그릴 수 있었던 다양한 형식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자신의 위세를 드러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짐작해 봅니다.
(『흥선대원군과 운현궁 사람들』, 서울역사박물관, 2007. p.16~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