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유물 이야기] 이름이 바뀐 헌종의 정자, 평원루

otimetour
2024-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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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낙선재 후원 언덕에 ‘상량정(上凉亭)’이라 편액¹ 한 정자가 있습니다. 잘 다듬은 여섯 개의 웬만한 건물 일층 높이에 이르는 돌기둥 위에 육각형으로 우뚝한 이 정자에 오르면 남산이 시원스레 보입니다. 그러나 원래 이 정자의 이름은 ‘평원루(平遠樓)’였고 당시의 편액이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상량정낙선재는 조선 24대 왕인 헌종(1827-1849)이 1847년 자신의 거처로 지었습니다. 헌종은 글씨를 잘 썼으며 서화(書畵)에 대한 관심이 각별한 예술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헌종의 어머니 신정왕후는 헌종이 23세의 나이로 요절한 후 “옛 사람의 서첩(書帖)을 몹시 사랑하였다”고 회상하며 슬퍼했습니다. 헌종은 당대 최고의 명필가인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를 좋아했고 추사의 제자 소치(小癡) 허련(許鍊)의 그림에도 관심을 보였습니다.

헌종은 소치를 낙선재로 불러 자신의 앞에서 그림을 그리게 하고 소장 중인 고서화를 감정하게 했습니다. 『소치실록(小癡實錄)』에 당시의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 낙선재로 들어가니 바로 상감이 평상시 거처하시는 곳으로 좌우의 현판 글씨는 완당(阮堂)의 것이 많았습니다. 향천(香泉), 연경루(硏經樓), 유재(留齋), 자이당(自怡堂), 고조당(古藻堂)이 그것이었습니다. 낙선재 뒤에는 평원정(平遠亭)이 있었습니다.


완당은 추사의 또 다른 호입니다. 당시 추사는 당쟁의 희생물로 제주도에 귀양살이 하고 있었습니다. 헌종은 또한 소치에게 추사의 근황을 물었습니다.


… 또 물으시기를 “김추사(金秋史)의 귀양살이가 어떠한가?” 하시기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소신이 목격했사오니 자세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위리(圍籬)² 안의 벽에는 도배를 하지 않은 방에 북창(北窓)을 행해 꿇어 앉아 정(丁)자 모양으로 좌장(坐杖)에 몸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밤낮 마음 편히 자지도 못하며 밤에도 늘 등잔불을 끄지 않습니다. 숨이 경각에 달려 얼마 보전하지 못 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소치가 헌종에게 전하는 추사의 귀양살이는 눈물겹기만 합니다. 이런 소치의 애원과 헌종의 추사에 대한 사랑도 추사의 귀양살이를 멈추게 못 합니다. 당시 정치상황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평원루소치가 ‘평원루’를 ‘평원정’이라고 묘사한 것은 평원루가 정자이기 때문에 글을 쓸 당시 착각한 것 같습니다. 그러면 평원루는 왜 상량정으로 바뀌었을까요? 일제강점기에 편찬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跡圖譜)』에는 상량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편액의 글씨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여 있습니다. 원래 조선시대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글씨를 썼습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이 정자의 편액은 일제강점기에 바뀐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렇다면 정자의 편액을 원래의 것으로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에 대한 논의는 정답은 없습니다. 선택의 문제이겠지요.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에는 평원루 편액 말고도 약 400점에 달하는 현판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은 없어진 궁궐 전각에 달렸던 것이고 일부는 건물의 이름이 바뀌었기 때문에 이곳에 보관 중인 것도 있습니다.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했듯이 궁궐의 건축물도 이미 사라졌지만 편액으로 이름을 남기고 있습니다.


1 편액(扁額): 건축물 정면의 문과 처마·천장 사이에 건축물의 명칭을 써서 단 것을 말한다. 편액?건축과 관련된 글귀나 서화 등을 새긴 액자?기둥에 다는 주련(柱聯) 등을 통칭하여 현판(懸板)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 위리(圍籬): 유배된 죄인이 머무르는 집의 둘레에 가시로 친 울타리.


최종덕 (국립고궁박물관장)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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