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색의 비단으로 지은 한복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금박 장식으로 화려함이 더해집니다. 조선시대엔 금박으로 장식한 옷을 요즘처럼 누구나, 언제나 입을 수는 없었습니다. 현존하는 조선의 복식 유물 중 금박 장식이 되어 있는 것은 주로 왕실 복식, 그것도 특별한 때에 입는 옷들입니다. 원삼, 당의, 스란치마 같은 왕실 예복이나 너울, 도투락댕기, 활옷 같은 혼례복에 금박을 찍었고 무엇보다도 어린아이의 첫돌복에 아낌없이 금박 무늬를 베풀었습니다.
금박은 순금을 수없이 두드려 종잇장처럼 아주 얇게 편 것입니다. 금박 무늬는 여러 가지 문양을 새긴 목판에 접착제 역할을 하는 아교를 발라 도장처럼 옷감 위에 찍고, 옷감에 묻은 접착제 위에 금박을 올려 만듭니다. 입김이라도 잘못 불면 훅 날려가 버리는 순금박을 다뤄야하니 비싸고도 극히 섬세한 작업입니다. 왕실 복식의 금박 작업은 의례 때 필요한 옷과 물품을 만들던 상의원(尙衣院)이나 각종 행사를 준비하던 임시기구인 도감(都監)에 소속된 장인들이 담당했습니다. 이들이 복식에 금박 문양을 찍을 때 사용했던 다양한 무늬의 목판이 1,000여 점 궁궐에 남아 전해져서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우리 박물관에 소장된 금박 목판은 용 문양, 봉황 문양, 여러 가지 꽃 문양, 과일 문양, 문자 문양 등 종류가 다양한데 그 중 가장 많은 것이 문자 문양판입니다. 개수로 918점이나 되고 새겨진 글자에 따라 분류하면 295종에 이릅니다. 목판의 한 면, 또는 양 면에 글자 한 자씩이 단정한 서체와 일정한 크기로 돋을새김 되어있습니다. 이 글자판을 조합하여 ‘壽福康寧(수복강녕)’, ‘萬壽無疆(만수무강)’ 같이 좋은 뜻을 지닌 글귀를 만들어 무늬삼아 찍는 것이죠. 이러한 문양을 길상어문(吉祥語紋)이라고 합니다. 동물, 꽃, 과일 등의 문양도 모두 왕실의 권위라던가 장수, 부귀영화, 자손번창, 부부애 같은 상징 의미를 담고 있지만 이미지보다는 문자로 된 글에 기원의 내용을 훨씬 구체적으로 담을 수 있습니다.
영친왕이 입었다는 분홍색 사규삼 뒷면 양 소맷부리에는 각각 ‘壽如山(수여산)’, ‘富如海(부여해)’라는 문구가 금박으로 찍혀 있습니다. 이는 ‘산과 같은 오랜 수명, 바다와 같이 넉넉한 부’로 풀이할 수 있겠습니다. 이구의 어린 시절 조끼에도 좌우에 같은 글귀가 금박되어 있지요. 富(부)는 福(복)으로 바꿔 쓰기도 합니다. 우리 박물관에 있는 붓주머니 중엔 ‘壽如南山(수여남산) 福如北海(복여북해)’라는 글이 수놓아진 것이 있는데요, 이 문구는 ‘壽山福海(수산복해)’로 줄여 쓰기도 합니다. 이렇게 옛 사람들은 수명을 산에, 부나 복을 바다에 비유하여 대구(對句)를 이룬 말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이 문구는 ‘壽?如’, ‘壽?山’, ‘富?海’자를 양 면에 새긴 이런 문양판들을 사용해서 옷에 찍었던 것이죠.
영친왕의 사규삼을 앞으로 돌려보죠. 양 소맷부리에 각각 ‘壽富貴(수부귀)’, ‘多男子(다남자)’라고 금박하였습니다. 이 구절은 『장자(莊子)』 「천지(天地)」편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중국 고대의 성군인 요堯임금이 화華 지역을 방문했는데 그 지역의 봉인(封人, 변경을 지키던 벼슬아치)이 요임금에게 오래 살며[壽], 부유하고[富], 아들이 많기를[多男子] 축복했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바라는 이 세 가지 복을 요임금은 덕을 기르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사양했다고 합니다만, 어쨌든 ‘壽(수), 富貴(부귀), 多男子(다남자)’는 복식에 즐겨 장식으로 사용하는 어구가 되었습니다. ‘수부귀 다남자’를 찍기 위해선 이런 문양판이 필요했겠죠? ‘壽?富’, ‘貴?多’, ‘男?子’를 새긴 목판입니다.
이 이야기로 인해 ‘華封三祝(화봉삼축, 화 봉인의 세 가지 축복)’이라는 말이 임금님께 복을 빈다는 의미가 되어 이 또한 왕실에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아래 이구의 전대에서 ‘화봉삼축’을 찾아보세요.
이 외에도 많은 글귀가 찍혀 있습니다. 한 벌의 아이 옷 안에 얼마나 많은 소망이 담겨있는지 보셨나요? 왕자의 옷을 만들고 장식했던 장인들이 만들어 사용한 작고 평범한 문자판들 속에는, 금박을 입지 못한 얼마나 많은 말들이 더 숨어 있을지요.
이홍주 (유물과학과 학예연구사)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색색의 비단으로 지은 한복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금박 장식으로 화려함이 더해집니다. 조선시대엔 금박으로 장식한 옷을 요즘처럼 누구나, 언제나 입을 수는 없었습니다. 현존하는 조선의 복식 유물 중 금박 장식이 되어 있는 것은 주로 왕실 복식, 그것도 특별한 때에 입는 옷들입니다. 원삼, 당의, 스란치마 같은 왕실 예복이나 너울, 도투락댕기, 활옷 같은 혼례복에 금박을 찍었고 무엇보다도 어린아이의 첫돌복에 아낌없이 금박 무늬를 베풀었습니다.
금박은 순금을 수없이 두드려 종잇장처럼 아주 얇게 편 것입니다. 금박 무늬는 여러 가지 문양을 새긴 목판에 접착제 역할을 하는 아교를 발라 도장처럼 옷감 위에 찍고, 옷감에 묻은 접착제 위에 금박을 올려 만듭니다. 입김이라도 잘못 불면 훅 날려가 버리는 순금박을 다뤄야하니 비싸고도 극히 섬세한 작업입니다. 왕실 복식의 금박 작업은 의례 때 필요한 옷과 물품을 만들던 상의원(尙衣院)이나 각종 행사를 준비하던 임시기구인 도감(都監)에 소속된 장인들이 담당했습니다. 이들이 복식에 금박 문양을 찍을 때 사용했던 다양한 무늬의 목판이 1,000여 점 궁궐에 남아 전해져서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우리 박물관에 소장된 금박 목판은 용 문양, 봉황 문양, 여러 가지 꽃 문양, 과일 문양, 문자 문양 등 종류가 다양한데 그 중 가장 많은 것이 문자 문양판입니다. 개수로 918점이나 되고 새겨진 글자에 따라 분류하면 295종에 이릅니다. 목판의 한 면, 또는 양 면에 글자 한 자씩이 단정한 서체와 일정한 크기로 돋을새김 되어있습니다. 이 글자판을 조합하여 ‘壽福康寧(수복강녕)’, ‘萬壽無疆(만수무강)’ 같이 좋은 뜻을 지닌 글귀를 만들어 무늬삼아 찍는 것이죠. 이러한 문양을 길상어문(吉祥語紋)이라고 합니다. 동물, 꽃, 과일 등의 문양도 모두 왕실의 권위라던가 장수, 부귀영화, 자손번창, 부부애 같은 상징 의미를 담고 있지만 이미지보다는 문자로 된 글에 기원의 내용을 훨씬 구체적으로 담을 수 있습니다.
영친왕이 입었다는 분홍색 사규삼 뒷면 양 소맷부리에는 각각 ‘壽如山(수여산)’, ‘富如海(부여해)’라는 문구가 금박으로 찍혀 있습니다. 이는 ‘산과 같은 오랜 수명, 바다와 같이 넉넉한 부’로 풀이할 수 있겠습니다. 이구의 어린 시절 조끼에도 좌우에 같은 글귀가 금박되어 있지요. 富(부)는 福(복)으로 바꿔 쓰기도 합니다. 우리 박물관에 있는 붓주머니 중엔 ‘壽如南山(수여남산) 福如北海(복여북해)’라는 글이 수놓아진 것이 있는데요, 이 문구는 ‘壽山福海(수산복해)’로 줄여 쓰기도 합니다. 이렇게 옛 사람들은 수명을 산에, 부나 복을 바다에 비유하여 대구(對句)를 이룬 말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이 문구는 ‘壽?如’, ‘壽?山’, ‘富?海’자를 양 면에 새긴 이런 문양판들을 사용해서 옷에 찍었던 것이죠.
영친왕의 사규삼을 앞으로 돌려보죠. 양 소맷부리에 각각 ‘壽富貴(수부귀)’, ‘多男子(다남자)’라고 금박하였습니다. 이 구절은 『장자(莊子)』 「천지(天地)」편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중국 고대의 성군인 요堯임금이 화華 지역을 방문했는데 그 지역의 봉인(封人, 변경을 지키던 벼슬아치)이 요임금에게 오래 살며[壽], 부유하고[富], 아들이 많기를[多男子] 축복했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바라는 이 세 가지 복을 요임금은 덕을 기르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사양했다고 합니다만, 어쨌든 ‘壽(수), 富貴(부귀), 多男子(다남자)’는 복식에 즐겨 장식으로 사용하는 어구가 되었습니다. ‘수부귀 다남자’를 찍기 위해선 이런 문양판이 필요했겠죠? ‘壽?富’, ‘貴?多’, ‘男?子’를 새긴 목판입니다.
이 이야기로 인해 ‘華封三祝(화봉삼축, 화 봉인의 세 가지 축복)’이라는 말이 임금님께 복을 빈다는 의미가 되어 이 또한 왕실에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아래 이구의 전대에서 ‘화봉삼축’을 찾아보세요.
이 외에도 많은 글귀가 찍혀 있습니다. 한 벌의 아이 옷 안에 얼마나 많은 소망이 담겨있는지 보셨나요? 왕자의 옷을 만들고 장식했던 장인들이 만들어 사용한 작고 평범한 문자판들 속에는, 금박을 입지 못한 얼마나 많은 말들이 더 숨어 있을지요.
이홍주 (유물과학과 학예연구사)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