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문화유산] 세종 태지석과 태항아리

otimetour
2024-12-05
조회수 59


세종 태지석과 태항아리(世宗胎誌石·胎壺)


연대 - 태지석: 1601년 | 태항아리: 1601년 추정 

재질 - 태지석: 석제 | 태항아리: 도자기 

크기 - 태지석 가로: 21.6cm, 세로: 21.9cm, 두께: 3.5cm | 태항아리 몸체 높이: 25.4cm, 입지름: 17.6cm, 바닥지름: 13.2cm | 태항아리 뚜껑 높이: 8.6cm, 지름: 19.9cm 



조선 제4대 국왕 세종(재위 1418~1450)의 태항아리와 태지석이다.
태항아리에는 태어난 왕손의 안녕과 나라의 번영을 기원하며 엄격한 의식을 거쳐 왕손의 태를 잘 씻어 담았으며, 태지석에는 태의 주인, 태어난 때, 태를 묻은 때를 새겼다.


세종의 태실은 경남 사천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일제강점기 서삼릉 태실로 이전되었다. 1996년 서삼릉 태실 발굴조사시에는 백자항아리와 태지석만 출토되었는데,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 사진에 의하면, 최초 사천의 세종 태실에서는 태지석, 백자항아리, 도기항아리, 청자뚜껑 4점인 것으로 확인된다. 일제강점기에 세종의 태를 서삼릉으로 이안하면서 백자항아리와 태지석만 다시 묻고, 도기 항아리와 청자 뚜껑은 이왕가 미술관으로 인계되어 오늘날 국립중앙박물관에 전하고 있다.


백자 태항아리는 매우 이례적인 형태로 몸체에 3개의 고리가 이중으로 모두 6개 붙어 있고, 뚜껑에도 3개의 고리가 부착되어 있다. 태지석에 “세종대왕 태실 황명만력이십구년 삼월 이십이일 개장(世宗大王胎室皇明萬曆二十九年三月二十二日改藏)"이라는 명문이 있어 제작 연대가 1601년(선조 34)임을 알 수 있다. 백자 태항아리도 이때 새로 제작되어 안치된 것으로 추정되며, 『세종대왕태실석난간수개의궤(世宗大王胎室石欄干修改儀軌)』 (1601년)에 관련 내용이 전한다.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