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유물 이야기] 여러 임금의 글씨 모음집, 열성어필

otimetour
2024-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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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고궁박물관은 임금이 직접 쓴 글씨의 원본과 목판본(木版本)이나 석판본(石板本) 글씨, 석판본을 인쇄하기 위해 돌에 새긴 석판의 원본도 소장하고 있습니다. 유물은 여러 임금의 글씨를 석판본으로 탁본하여 첩으로 엮은 ‘열성어필’로, 열성은 여러 임금을 말하며 어필은 임금이 직접 쓴 글을 말합니다. 임금이 지은 글을 어제御製라 부르고 임금의 글씨는 어필御筆이라 칭하였습니다. 어제·어필은 제왕의 풍모를 전해주는 상징으로 여겨 존숭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이들 어제·어필은 왕이 승하하면 새로 즉위한 왕이 선왕의 실록 편찬과 함께 어제·어필을 수집하고 간행하였습니다. 1662년(현종 3) 《열성어필》이 처음으로 간행된 이후 숙종·경종·영조대에도 간행이 이어졌습니다.

열성어필

이 열성어필은 숙종대에 간행되었습니다. 열성어필에 수록된 임금이 문종 임금부터 시작하여 현종 임금에서 끝나, 현종의 아들이 되는 숙종 임금 때 간행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숙종대 간행된 열성어필에는 조선을 개국한 태조임금의 글씨는 빠져 있습니다. 태조의 임금의 글씨는 1711년(숙종 37년)에 알려지게 되고 그 후 영조대 추가되어 간행되며 숙종 당시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보통 열성어필을 간행하고 나서 신료들에게 나눠주는 반사(頒賜)가 있었으며, 반사할 적에는 보통 책의 앞면에 누구누구에게 내려준다는 내사기(內賜記)가 있습니다. 이 열성어필에는 내사기가 없으나 반사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첩의 맨 뒷면에 당시 소장하고 있던 노씨의 부친이 숙종임금으로부터 하사 받았다는 내용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당시 소장자 노씨의 발문


 “이 [열성어필사십팔첩(列聖御筆四十八貼)]은 바로 지금 주상께서 돌아가신 부친에게 하사하여 주신 것이다. 상자에 보관하셨다가 나에게 물려주셨으니, 전해야할 보배라 하겠다. 아! 선고(先考)께서 이러한 경사가 있으셨고, 나도 이 보물을 받게 되었다. 군주와 부모의 은택은 모두 헤아릴 길이 없으며, 이는 실로 특별한 경우이다. 나는 마땅히 정성스럽게 보관하여 파실(破失)이 되지 않게 하고, 공경스럽게 그 가르침을 면행(勉行)하고자 한다. 강희(康熙) 37년 4월 일 주인 노씨(盧氏) 수결”

노씨의 글에서 열성어필이 사십팔첩이라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사십구첩입니다. 첩에는 각각 일련번호가 음각으로 표기 되어 있는데, 효종 임금 글씨 중 하나에 일련 번호가 빠져 있습니다. 영조대 추가로 간행된 열성어필에는 일련번호가 없는 효종의 글씨가 제외 되어 있습니다. 숙종대 열성어필이 처음 간행된 해가 1679년(숙종 5년)인데, 그 이후에 효종 임금의 글씨로 알려져 수록되었다가 어떤 이유인지는 더 조사가 필요하겠지만 다시 제외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후왕이 선왕의 어필을 이처럼 간행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영조 임금이 지은 어필간행의 목적을 밝히는 글에서 “지금 내가 문장과 글씨에 이처럼 열심인 것은 어찌 나만을 위함인가? 의도는 선대(先代)를 거듭 계승하고자 함이다. 문필(文筆)에 이처럼 열심이거늘 정치야 말할 필요가 있는가?”라고 밝히고 있어 선왕의 선정을 잇고자 했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간행한 어필을 반사함으로써 신료들은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도 절로 들 수 있었던 것을 이 열성어필 소장자의 글을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한편 열성어필에 수록된 국왕의 서체는 당대의 학문 경향과 예술 성향을 대표하는 명필임을 알 수 있으며, 시대에 따라 송설체(松雪體), 석봉체(石峰體), 촉체(蜀體) 등으로 변화되어 가는 모습도 살필 수 있습니다. 



양웅열 (유물과학과 학예연구사)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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