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유물 이야기] 금속활자로 책을 찍다, '활자조판'

otimetour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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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금속활자로 인출한 책은 현재 국내 여러 박물관, 도서관에 남아 있으며, 국립중앙박물관, 고려대학교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등에는 그 당시 인출에 이용되었던 금속활자와 인출 판이 남아 있습니다. 이번에 소개할 국립고궁박물관 소장품은 금속활자의 책 인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활자조판 입니다.

한국에서 전통적으로 책을 찍어내는(인출) 방법에는 크게 목판 인쇄술과 활자 인쇄술이 있습니다. 목판 인쇄술은 글자를 나무판에 새기고 목판의 표면에 먹을 발라 찍는 방법이며, 활자 인쇄술은 목활자, 금속활자 등을 만들어 인출 판에 꽂고 먹을 발라서 찍어 내는 방법을 말합니다. 목판은 한번 새겨놓으면 다량 인출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으나, 책 한 쪽 당 한 개의 목판을 만들어야 하고, 목판 보관을 위한 넓은 공간도 필요하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반면에 활자 인쇄술은 활자를 한번 만들면 조합하여 원하는 책을 인출하고, 또 인출 후 판을 해체하여 다른 책을 인출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다만 활자 인쇄술은 목판보다 인출 과정이 번거로워 하루에 많은 수량을 인출하기는 힘들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금속활자는 국가 기관인 주자소에서 전담하여 제작하였습니다. 태종대부터 왕명으로 금속활자 제작을 시작하였는데, 세종대에 이르러 제작 기술은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금속활자는 여러 종류가 만들어졌는데, 글자체, 크기, 형태, 활자 제작 배경 등이 활자에 따라서 각각 달랐습니다. 또 금속활자는 인출의 완성도, 글자체, 역사적 배경 등에 따라서 사용 기간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세종대에 제작된 갑인자(甲寅字)는 활자의 모양이 바르고 분명하여 조선시대에 널리 사용되었는데, 여러 번 사용하여 활자가 닳고 이지러졌을 때 인출된 글자를 활용해서 금속활자를 다시 제작하게 하여 여섯 번 거듭 제작하여 조선 후기까지 사용되었으며, 1450년(세종 32)에 안평대군의 글자체를 바탕으로 제작된 경오자(庚午字)는 세조의 즉위 과정에 반대한 안평대군의 글자체라는 이유로 왕명으로 1455년(세조 1)에 을해자(乙亥字)를 주조할 때 녹여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또 조선 후기에는 명나라에서 유입되어 유행한 글자체인 인서체(印書體)가 활자에 나타나기도 하였으며, 민간에서 만든 활자가 국가에 유입되어 활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번에 소개하는 활자조판은 네모난 두꺼운 목재 위에 세로 좌우 각 2개, 가로 위아래 각 3개의 못을 박아 붙인 네 테두리가 일체형으로 된 금속 틀(인판 틀)이 있고, 위아래 측면에 붉은 색으로 쓴 ‘三六六四’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금속 틀의 표면에는 긴 직사각형 형태의 굳은 흙으로 보이는 덩어리들이 고착되어 있는데, 굳은 흙은 한 칸 한 칸 구획이 나누어져 활자가 조판되었던 흔적을 보여줍니다. 자세한 크기는 아래와 같습니다.


활자조판.

목재 받침

   세로 33.7cm, 가로 46cm, 두께 7.2cm

금속 틀(인판 틀)

   세로 25.3cm, 가로 36.2cm, 두께 1.2cm 

인출 면

   세로 24.9cm, 가로 36cm

활자 조판 부분

   세로 1.0~1.2cm, 가로 1.3~1.5cm



이 소장품의 현재 모습은 책 인출 과정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보다 분명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금속활자로 책을 인출하기 위해서는 금속 틀인 인판 틀이 마련되어야 하는데 소개하는 소장품처럼 네 테두리가 고정형인 틀도 있고, 테두리가 분리되어 조립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인판 틀이 마련되면 조판할 활자를 준비하고, 활자를 꽂을 수 있도록 인판 틀에 밀랍 등을 깝니다. 그리고 경계선을 만들기 위해 자 형태의 긴 막대를 세로로 심고 그 사이에 활자를 꽂고 눌러 수평을 맞춥니다. 활자가 움직이거나 수평이 맞지 않을 경우에는 대나무 조각 또는 파지 등으로 활자를 괴거나 틈에 끼워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시킵니다. 활자가 조판되면 먹솔로 활자 면에 먹물을 고루 칠하고 문질러서 인출합니다. 인출 면은 가운데 한 줄을 기준으로 종이 한 장에 양 쪽 두 면이 인출됩니다.


한국의 고서는 전통적으로 목판이든 금속활자판이든 종이 한 장을 찍으면 인출된 종이의 가운데가 밖으로 나오도록 접어 앞뒤 양 쪽이 되도록 하여 안쪽 면들을 실로 묶어 책으로 장정하였습니다. 인판 면에 고착되어 있는 굳은 흙덩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한 면에 금속활자를 10행 18자로 조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활자판

현재 남아있는 굳은 물질들은 비파괴 분석 결과 흙덩이로 보이며 흙덩이의 측면에는 푸른 부식물이 검출되었습니다. 흙덩이에서 밀랍은 추출되지는 않았고 흙에서 자연적으로 검출되지 않는 방해석과 중정석이 확인됨에 따라 두 물질을 첨가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활자를 놓았던 흙덩이의 표면을 분석해보면 표면의 가운데에 비해 양쪽 끝에 구리와 주석과 납이 높게 검출되는 것으로 보아 양쪽 끝에 다리가 있는 형태의 활자를 심었던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분석 결과를 통해서 살펴볼 때, 인출 판에는 흙덩이로 된 물질을 깔고 그 위에 경계선을 그어주는 역할을 하는 금속 막대와 활자를 심어 인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이 소장품은 경계선 기능의 금속 막대와 활자가 남아 있지 않고 일부 흔적만 남아 있어 어떤 금속활자의 인출 판으로 사용되었는지 단정할 수는 없지만 틀의 네 테두리가 붙은 형태, 인찰 면의 가로 세로 크기, 행자수 등의 특징들과 현존 본을 비교해 볼 때 1434년(세종 16), 갑인년에 만든 활자인 갑인자의 글자체를 따서 1772년(영조 48), 임진년에 다섯 번째로 주조한 ‘임진자(壬辰字)’ 또는 1777년(정조 1), 정유년에 여섯 번째로 주조한 ‘정유자(丁酉字)’를 조판한 판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 중 국립고궁박물관 소장품인 ‘임진자’로 인출한 책 『갱장록(羹墻錄)』의 한 면을 살펴보면 금속활자가 어떤 식으로 조판되었을지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금속활자

현재 정보의 한계로 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이 소장품은 조선 시대 금속활자 인쇄 문화의 한 단면을 추적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습니다. 향후 이 소장품에 관한 다양한 연구를 통해 가치가 널리 드러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 이 글은 ‘천혜봉, 『한국 서지학』 (서울: 민음사, 2006)’과 ‘청주고인쇄박물관, 『2007 조선왕실 주조 금속활자 복원사업 결과보고서 ‘甲寅字와 한글활자’』 (청주시: 청주고인쇄박물관, 2008)’를 참고하여 작성하였습니다.  


이상백(유물과학과 학예연구사)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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