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궐패’란 중국 황제[天子]를 상징하는 기물로서, 매해 정월 초하루[正朝]와 동지, 황제의 생일[聖節] 등 특별한 날에 황제에게 하례하는 의식인 ‘망궐례(望闕禮)’에 사용된 물건입니다. 궐패와 비슷한 물건으로 ‘전패(殿牌)’라는 것도 있었는데, 황제가 머무르는 ‘궐’ 대신 조선국왕이 머무르는 ‘전(殿)’자를 새긴 패로 조선국왕의 상징물이었습니다.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된 ‘궐패(闕牌)’는 지붕처럼 보이는 연잎[荷葉]형의 장식 조각 아래의 네모난 몸체에 ‘궐(闕)’자가 쓰여 있습니다. 글씨는 종이를 목판에 올려 윤곽을 따고 그 모양대로 얕게(1mm 미만) 음각한 다음, 밝은 색깔의 목재를 얇게 켜서 오려붙인 것입니다. 글자의 획이 진행하는 방향대로 나뭇결을 맞추어 마치 붓자국과 같은 느낌을 줍니다. 궐패의 하단에는 홈이 새겨진 받침에 꽂아 세울 수 있도록 ‘철(凸)’자 모양의 돌출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궐패의 뒷면에는 별도로 ‘전’자가 새겨져 있어, 뒤집으면 전패가 됩니다. 천자와 제후라는 완전히 별개의 군주권을 상징하는 것이니 양면 겸용의 물건을 만든다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고, 실제로 대개의 전패는 뒷면이 공백인 것을 보면 대단히 의아한 생각이 듭니다.
어째서 이런 것이 제작되었을까요? 오늘날 궐패와 전패에 대한 설명 중에는 두 가지를 구분하지 않고 섞어서 설명하는 경우가 있는데, 국립고궁박물관의 궐패?전패가 이러한 혼동과 관련이 있을까요? 여러 가지 의문을 안고 궐패?전패와 망궐례의 역사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조선시대의 임금은 왕위를 계승하면 중국의 황제에게 사신을 보내 이를 알렸습니다. 그러면 황제는 새로운 왕의 지위를 인정하면서 조선국왕의 인장과 옷, 책봉문 등의 징표를 보내왔습니다. 명 중심의 국제질서 하에서 명 황제로부터 왕위계승을 추인받는 것은 왕권의 근원으로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황제를 위해 행하는 망궐례는 사실상 조선왕의 지배를 내적으로 확인하는 성격을 갖게 되었습니다.
한편, 조선 군신이 조선 왕궁에 궐패를 두고 망궐례를 행한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의 지방관들은 정월 초하루, 동지, 국왕의 탄일에 임지의 객사 정청에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두고 인사드리는 의식을 행했습니다. 원래 조선초기의 전례서에는 ‘사신과 외관이 정조?동지?탄일에 멀리서 하례드리는 의식[使臣及外官正至誕日遙賀儀]’ (이하 ‘요하의’)이라는 긴 이름으로 나타나는 의례입니다.
이처럼 조선 초기부터 국가의례로서 지속되었던 망궐례는 명?청교체기에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도 명에 대한 망궐례를 행하였고, 청에 항복하고 나서도 비밀리에 명 황제에 대한 망궐례를 행했습니다. 청의 칙사가 서울에 와 있을 때만 마지못해 청 황제[淸主]에 대한 망궐례를 하였을 뿐이니, 이때부터 망궐례는 유명무실해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조선국왕 지배권의 근거를 청 황제로부터 찾지 않겠다는 관념의 전환을 보여줍니다.
이 뒤로 ‘망궐례’라는 말의 용례에도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망궐례’가 황제에 대한 조선왕의 의례가 아니라 조선왕에 대한 조선 지방관의 의례, 즉 요하의를 지칭하는 사례들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전패와 궐패는 분명히 다른 물건이었지만 조선국왕도 망궐례를 하지 않는 마당에 전패를 궐패라 부르고 요하의를 망궐례라 부른다고 잡아다 처벌할 리도 없었습니다.
그 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각 군현의 ‘전패’를 ‘궐패’로 변경한다는 칙령(『고종실록』 권34, 대한 건양원년(1896) 8월 15일)에 따라 공식적으로 전패는 궐패가 되었고 외관요하의는 망궐례가 되었습니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남아 있는 궐패가 본래 조선국왕을 위한 제후의 전패였다가 고종 때 뒷면에 궐자를 새겨 황제의 궐패로 바뀌었는지, 애초에 궐패와 전패로 동시에 쓰였는지, 안타깝게도 추측을 넘어 증명할 근거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위패 양면에 황제와 제후의 상징이 각각 새겨져 있다는 점이 조선 왕권의 양면성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생각거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어 망궐례와 같은 의식에 대해 새로운 사실들이 더 밝혀질 것을 기대합니다.
* 윤석호, ?조선조 망궐례(望闕禮)의 중층적 의례구조와 성격? 『韓國思想史學』43. 한국사상사학회. 2013. 참고
박경지(유물과학과 학예연구사)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 속 왕실 유물 이야기'>
‘궐패’란 중국 황제[天子]를 상징하는 기물로서, 매해 정월 초하루[正朝]와 동지, 황제의 생일[聖節] 등 특별한 날에 황제에게 하례하는 의식인 ‘망궐례(望闕禮)’에 사용된 물건입니다. 궐패와 비슷한 물건으로 ‘전패(殿牌)’라는 것도 있었는데, 황제가 머무르는 ‘궐’ 대신 조선국왕이 머무르는 ‘전(殿)’자를 새긴 패로 조선국왕의 상징물이었습니다.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된 ‘궐패(闕牌)’는 지붕처럼 보이는 연잎[荷葉]형의 장식 조각 아래의 네모난 몸체에 ‘궐(闕)’자가 쓰여 있습니다. 글씨는 종이를 목판에 올려 윤곽을 따고 그 모양대로 얕게(1mm 미만) 음각한 다음, 밝은 색깔의 목재를 얇게 켜서 오려붙인 것입니다. 글자의 획이 진행하는 방향대로 나뭇결을 맞추어 마치 붓자국과 같은 느낌을 줍니다. 궐패의 하단에는 홈이 새겨진 받침에 꽂아 세울 수 있도록 ‘철(凸)’자 모양의 돌출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궐패의 뒷면에는 별도로 ‘전’자가 새겨져 있어, 뒤집으면 전패가 됩니다. 천자와 제후라는 완전히 별개의 군주권을 상징하는 것이니 양면 겸용의 물건을 만든다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고, 실제로 대개의 전패는 뒷면이 공백인 것을 보면 대단히 의아한 생각이 듭니다.
어째서 이런 것이 제작되었을까요? 오늘날 궐패와 전패에 대한 설명 중에는 두 가지를 구분하지 않고 섞어서 설명하는 경우가 있는데, 국립고궁박물관의 궐패?전패가 이러한 혼동과 관련이 있을까요? 여러 가지 의문을 안고 궐패?전패와 망궐례의 역사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조선시대의 임금은 왕위를 계승하면 중국의 황제에게 사신을 보내 이를 알렸습니다. 그러면 황제는 새로운 왕의 지위를 인정하면서 조선국왕의 인장과 옷, 책봉문 등의 징표를 보내왔습니다. 명 중심의 국제질서 하에서 명 황제로부터 왕위계승을 추인받는 것은 왕권의 근원으로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황제를 위해 행하는 망궐례는 사실상 조선왕의 지배를 내적으로 확인하는 성격을 갖게 되었습니다.
한편, 조선 군신이 조선 왕궁에 궐패를 두고 망궐례를 행한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의 지방관들은 정월 초하루, 동지, 국왕의 탄일에 임지의 객사 정청에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두고 인사드리는 의식을 행했습니다. 원래 조선초기의 전례서에는 ‘사신과 외관이 정조?동지?탄일에 멀리서 하례드리는 의식[使臣及外官正至誕日遙賀儀]’ (이하 ‘요하의’)이라는 긴 이름으로 나타나는 의례입니다.
이처럼 조선 초기부터 국가의례로서 지속되었던 망궐례는 명?청교체기에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도 명에 대한 망궐례를 행하였고, 청에 항복하고 나서도 비밀리에 명 황제에 대한 망궐례를 행했습니다. 청의 칙사가 서울에 와 있을 때만 마지못해 청 황제[淸主]에 대한 망궐례를 하였을 뿐이니, 이때부터 망궐례는 유명무실해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조선국왕 지배권의 근거를 청 황제로부터 찾지 않겠다는 관념의 전환을 보여줍니다.
이 뒤로 ‘망궐례’라는 말의 용례에도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망궐례’가 황제에 대한 조선왕의 의례가 아니라 조선왕에 대한 조선 지방관의 의례, 즉 요하의를 지칭하는 사례들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전패와 궐패는 분명히 다른 물건이었지만 조선국왕도 망궐례를 하지 않는 마당에 전패를 궐패라 부르고 요하의를 망궐례라 부른다고 잡아다 처벌할 리도 없었습니다.
그 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각 군현의 ‘전패’를 ‘궐패’로 변경한다는 칙령(『고종실록』 권34, 대한 건양원년(1896) 8월 15일)에 따라 공식적으로 전패는 궐패가 되었고 외관요하의는 망궐례가 되었습니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남아 있는 궐패가 본래 조선국왕을 위한 제후의 전패였다가 고종 때 뒷면에 궐자를 새겨 황제의 궐패로 바뀌었는지, 애초에 궐패와 전패로 동시에 쓰였는지, 안타깝게도 추측을 넘어 증명할 근거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위패 양면에 황제와 제후의 상징이 각각 새겨져 있다는 점이 조선 왕권의 양면성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생각거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어 망궐례와 같은 의식에 대해 새로운 사실들이 더 밝혀질 것을 기대합니다.
* 윤석호, ?조선조 망궐례(望闕禮)의 중층적 의례구조와 성격? 『韓國思想史學』43. 한국사상사학회. 2013. 참고
박경지(유물과학과 학예연구사)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 속 왕실 유물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