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의 특별한 아기, 원자(元子, 국왕과 왕비 사이에 출생한 왕세자 책봉 전의 맏아들)는 태어나면서부터 공부의 연속이었습니다. 탄생할 때부터 국왕으로 사망할 때까지 보양청(輔養廳), 강학청(講學廳), 시강원(侍講院), 경연청(經筵廳)에서 끊임없는 교육이 이루어졌습니다.
‘위로는 역대 선왕들의 왕업을 이어받고, 아래로 신하와 백성들의 안위가 달려 있으며, 국가가 흥하고 망하는 것이 왕세자에게 달려 있다.’ 라고 하며 조선 왕실은 장차 국왕이 될 왕세자에 대한 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국본(國本), 나라의 근본’으로 왕실의 온갖 주목을 받았던 왕세자의 하루는 어떠했을까요?
왕세자의 하루는 아침에 일어나 부모에게 문안인사를 드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문안인사를 다녀오면 아침식사 후, 바로 아침공부, 즉 세자시강원의 관료들이 지도하는 조강(朝講)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지난번에 배운 것을 확인하는 절차가 있어서 왕세자는 책을 덮고 배운 것을 암송해야 했습니다. 만약 제대로 암송하지 못하면 호된 질책이 있었습니다. 이어서 교수관들이 일과에 따라 교재의 본문에 나오는 글자의 음과 뜻을 풀어주고 그 문장의 의미를 해설하고 질의응답을 했습니다. 그 다음은 학습한 문장을 교수관이 낭독하고 세자가 따라서 낭독했습니다.
아침공부가 끝나면 간단한 점심 후, 낮 공부, 주강(晝講)을 시작했습니다. 수업방식은 조강과 같았습니다. 점심 공부가 끝나면 저녁 공부인 석강(夕講)을 하였습니다. 석강이 끝나면 저녁식사를 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다시 부모님께 밤새 안녕히 주무시도록 인사를 했습니다. 이것이 공식적인 왕세자의 하루 일과로 매일 매일이 반복되는 공부의 일상이었습니다.
왕세자의 공부는 시강원(侍講院)이라는 왕세자 전문 교육기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왕세자를 상징하는 ‘春’을 써서 춘방(春坊)으로도 불렀습니다. 왕의 후계자로 책봉된 왕세자의 본격적인 제왕 교육이 이루어진 곳으로 조선의 개국과 함께 있었던 것은 아니고 세조 때 처음 설립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은 성균관이었습니다. 성균관은 왕세자가 입학을 하긴 했어도 어디까지나 일반인을 위한 교육기관이었다면, 시강원은 왕세자만을 위한 조선왕실의 전담 교육기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왕세자는 책봉과 동시에 이곳에서 미래의 군주로 갖추어야할 지식과 자세를 함양시켜 나갔습니다.
국립고궁박물관에는 조선왕실의 왕세자 교육에 대한 많은 관심을 엿볼 수 있는 소장품이 전하고 있습니다. 시강원 명패, 춘방 현판, 왕세자입학도 등이 있습니다.
시강원 명패(命牌)(그림 1)는 국왕이 시강원의 관리를 부를 때 내린 부신(符信)입니다. 『보인부신총수(寶印符信總數)』 에 의하면 춘방 아패(牙牌)라고 불렀으며, 상아로 만들었습니다. 앞면에는 시강원(侍講院)과 국왕의 수결을 새기고, 뒷면에는 명(命)자와 직책을 새겼습니다. 모두 12부를 만들어 10부는 현재의 관원에게 주고, 2부는 검교(檢校) 즉 임시 관원에게 주었습니다.
왕세자를 교육시키는 관리인 시강관(侍講官)은 모두 당대의 실력자들로 임명되었습니다. 왕세자의 사부는 가장 고위직인 영의정과 좌·우의정이 담당하였는데, 이들은 공무로 바빠서 실제로 왕세자에게 교육을 시키는 사람들은 빈객(賓客, 시강원 소속 정2품 관직) 이하의 전임 관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문과 출신의 30~40대 참상관(參上官, 정3품에서 종6품의 관료)으로 왕세자가 국왕으로 즉위할 때 쯤이면 국가의 요직을 담당하게 될 중진 그룹의 관리들이었습니다.
왕의 스승은 ‘불소지신(不召之臣)’이라 하여 ‘함부로 부르지 못할 신하’ 라는 뜻으로 왕세자는 국왕이 된 후에도 스승을 예로서 대하였습니다. 그래서인지 국왕이 시강원 관리를 부를 때에도 상아라는 귀한 재료로 격을 높여 만든 패를 사용했습니다. 이 명패의 앞면에는 고종의 어압이 새겨져 있어 고종 대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춘방과 관련된 현판도 다수 전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 춘방현판(그림 2)은 기축년인 1829년(순조29) 8월 1일 효명세자(1809~1830년)가 직접 쓴 예필 현판으로 춘방 전각에 걸려 있었습니다. 우측의 ‘보도계옥(輔導啓沃)’은 왕세자를 잘 보좌하여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한다는 뜻으로 쓰인 것입니다. 또한, 영조는 특히 왕세자의 공부에 많은 관심을 보이며 춘방에 내린 윤음(綸音)을 현판(그림 3)으로 새겨서 걸게 하였습니다.
왕세자의 성균관 입학식을 그린 그림도 유명합니다.(그림 4) 이 그림은 효명세자[文祖, 1809~1830]가 9세가 되던 1817년(순조 17) 행했던 성균관 입학 의식을 그린 기록화입니다. 효명세자가 입학례 장소인 문묘로 가기 위해 궁궐을 나오는 장면, 문묘의 대성전에서 공자의 신위에 술잔을 올리는 의식, 박사에게 수업을 청하는 과정, 박사의 입학 수락을 받은 왕세자가 박사에게 폐물을 올리는 광경, 왕세자가 명륜당 실내에서 박사로부터 수업을 받는 장면 등을 왕세자의 자리와 이동 경로를 따라 상세하게 그렸습니다.
최연소로 왕세자에 책봉된 사람은 경종입니다. 3세에 책봉이 되었습니다. 인종은 6세, 숙종은 7세, 정조, 문종, 단종, 예종, 연산군은 8세에 왕세자(왕세손)으로 책봉되었습니다. 밖에서 뛰어 놀아야 하는 나이인데 국왕의 후계자로 살아야 할 왕세자.
“왕좌에 앉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라는 말처럼 어린 왕세자의 어깨가 참 무거웠을 것 같습니다.
김정임(국립고궁박물관 유물과학과 학예연구관)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 속 왕실 유물 이야기>
왕실의 특별한 아기, 원자(元子, 국왕과 왕비 사이에 출생한 왕세자 책봉 전의 맏아들)는 태어나면서부터 공부의 연속이었습니다. 탄생할 때부터 국왕으로 사망할 때까지 보양청(輔養廳), 강학청(講學廳), 시강원(侍講院), 경연청(經筵廳)에서 끊임없는 교육이 이루어졌습니다.
‘위로는 역대 선왕들의 왕업을 이어받고, 아래로 신하와 백성들의 안위가 달려 있으며, 국가가 흥하고 망하는 것이 왕세자에게 달려 있다.’ 라고 하며 조선 왕실은 장차 국왕이 될 왕세자에 대한 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국본(國本), 나라의 근본’으로 왕실의 온갖 주목을 받았던 왕세자의 하루는 어떠했을까요?
왕세자의 하루는 아침에 일어나 부모에게 문안인사를 드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문안인사를 다녀오면 아침식사 후, 바로 아침공부, 즉 세자시강원의 관료들이 지도하는 조강(朝講)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지난번에 배운 것을 확인하는 절차가 있어서 왕세자는 책을 덮고 배운 것을 암송해야 했습니다. 만약 제대로 암송하지 못하면 호된 질책이 있었습니다. 이어서 교수관들이 일과에 따라 교재의 본문에 나오는 글자의 음과 뜻을 풀어주고 그 문장의 의미를 해설하고 질의응답을 했습니다. 그 다음은 학습한 문장을 교수관이 낭독하고 세자가 따라서 낭독했습니다.
아침공부가 끝나면 간단한 점심 후, 낮 공부, 주강(晝講)을 시작했습니다. 수업방식은 조강과 같았습니다. 점심 공부가 끝나면 저녁 공부인 석강(夕講)을 하였습니다. 석강이 끝나면 저녁식사를 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다시 부모님께 밤새 안녕히 주무시도록 인사를 했습니다. 이것이 공식적인 왕세자의 하루 일과로 매일 매일이 반복되는 공부의 일상이었습니다.
왕세자의 공부는 시강원(侍講院)이라는 왕세자 전문 교육기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왕세자를 상징하는 ‘春’을 써서 춘방(春坊)으로도 불렀습니다. 왕의 후계자로 책봉된 왕세자의 본격적인 제왕 교육이 이루어진 곳으로 조선의 개국과 함께 있었던 것은 아니고 세조 때 처음 설립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은 성균관이었습니다. 성균관은 왕세자가 입학을 하긴 했어도 어디까지나 일반인을 위한 교육기관이었다면, 시강원은 왕세자만을 위한 조선왕실의 전담 교육기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왕세자는 책봉과 동시에 이곳에서 미래의 군주로 갖추어야할 지식과 자세를 함양시켜 나갔습니다.
국립고궁박물관에는 조선왕실의 왕세자 교육에 대한 많은 관심을 엿볼 수 있는 소장품이 전하고 있습니다. 시강원 명패, 춘방 현판, 왕세자입학도 등이 있습니다.
시강원 명패(命牌)(그림 1)는 국왕이 시강원의 관리를 부를 때 내린 부신(符信)입니다. 『보인부신총수(寶印符信總數)』 에 의하면 춘방 아패(牙牌)라고 불렀으며, 상아로 만들었습니다. 앞면에는 시강원(侍講院)과 국왕의 수결을 새기고, 뒷면에는 명(命)자와 직책을 새겼습니다. 모두 12부를 만들어 10부는 현재의 관원에게 주고, 2부는 검교(檢校) 즉 임시 관원에게 주었습니다.
왕세자를 교육시키는 관리인 시강관(侍講官)은 모두 당대의 실력자들로 임명되었습니다. 왕세자의 사부는 가장 고위직인 영의정과 좌·우의정이 담당하였는데, 이들은 공무로 바빠서 실제로 왕세자에게 교육을 시키는 사람들은 빈객(賓客, 시강원 소속 정2품 관직) 이하의 전임 관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문과 출신의 30~40대 참상관(參上官, 정3품에서 종6품의 관료)으로 왕세자가 국왕으로 즉위할 때 쯤이면 국가의 요직을 담당하게 될 중진 그룹의 관리들이었습니다.
왕의 스승은 ‘불소지신(不召之臣)’이라 하여 ‘함부로 부르지 못할 신하’ 라는 뜻으로 왕세자는 국왕이 된 후에도 스승을 예로서 대하였습니다. 그래서인지 국왕이 시강원 관리를 부를 때에도 상아라는 귀한 재료로 격을 높여 만든 패를 사용했습니다. 이 명패의 앞면에는 고종의 어압이 새겨져 있어 고종 대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춘방과 관련된 현판도 다수 전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 춘방현판(그림 2)은 기축년인 1829년(순조29) 8월 1일 효명세자(1809~1830년)가 직접 쓴 예필 현판으로 춘방 전각에 걸려 있었습니다. 우측의 ‘보도계옥(輔導啓沃)’은 왕세자를 잘 보좌하여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한다는 뜻으로 쓰인 것입니다. 또한, 영조는 특히 왕세자의 공부에 많은 관심을 보이며 춘방에 내린 윤음(綸音)을 현판(그림 3)으로 새겨서 걸게 하였습니다.
최연소로 왕세자에 책봉된 사람은 경종입니다. 3세에 책봉이 되었습니다. 인종은 6세, 숙종은 7세, 정조, 문종, 단종, 예종, 연산군은 8세에 왕세자(왕세손)으로 책봉되었습니다. 밖에서 뛰어 놀아야 하는 나이인데 국왕의 후계자로 살아야 할 왕세자.
“왕좌에 앉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라는 말처럼 어린 왕세자의 어깨가 참 무거웠을 것 같습니다.
김정임(국립고궁박물관 유물과학과 학예연구관)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 속 왕실 유물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