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고궁박물관은 매우 많은 수의 보자기를 소장하고 있습니다. 국립고궁박물관의 대표 소장품인 어보(御寶)와 어책(御冊) 등을 포장하여 보관하는 데 사용했던 수천 여 점의 보자기를 비롯해, 대한제국 황실에서 영친왕비에게 내려 준 장신구를 쌌던 색색의 비단보자기와 창덕궁에서 전래된 보자기에 이르기까지 이 모두를 합하면 국내 박물관 중 가장 많은 보자기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조선 왕실은 귀중한 물건을 포장할 때 보자기로 싸서 상자나 함에 넣고 그 함을 다시 보자기로 감싸 포장했습니다. 예를 들어 어보의 경우 홍색 비단보자기로 포장했는데, 먼저 어보를 보자기로 싸서 내함인 보통(寶筒)에 넣은 다음 그 보통을 보자기로 싸서 외함인 보록(寶?)에 넣고 그 보록을 다시 보자기로 감쌌습니다. 어보 하나를 포장하는 데에만 2개의 함과 3장의 보자기가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조선 왕실에서는 귀중한 물건 하나하나를 격식을 갖추어 정성스럽게 포장하는 문화가 발달했고, 그에 따라 많은 수량의 보자기가 제작되고 사용되었습니다.
조선 말기 궁중에서 제작하여 사용한 보자기의 목록인 보(?)발기에 보자기의 재질과 색깔·크기별 수량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물을 통해 혼례와 같은 중요한 왕실 행사에 수백 장의 보자기가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보발기 중에는 보자기 표면에 물감으로 여러 가지 무늬를 그려 장식한 ‘인문보(引紋?)’의 목록도 포함되어 있어서 인문보 역시 수백 장씩 제작되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인문보 유물은 14점에 불과합니다. 이 인문보 유물들은 창덕궁에서 전래된 것들로 일부 유물에는 과거에 물건을 쌌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인문보들은 모두 하나같이 보자기 정중앙에 마주 보고 있는 모습의 봉황 한 쌍이 그려져 있어서 ‘봉황문인문보(鳳凰紋引紋?)’로 불립니다. 봉황은 상서로움과 고귀함,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상징하는 상상의 새로 수컷을 ‘봉(鳳)’, 암컷을 ‘황(凰)’이라고 합니다. 중국 후한대에 편찬된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따르면 봉의 앞부분은 기러기, 뒤는 기린, 뱀의 목, 물고기의 꼬리, 황새의 이마, 원앙새의 깃, 용의 무늬, 호랑이의 등, 제비의 턱, 닭의 부리를 가졌으며, 오색(五色)을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봉황문인문보에는 봉황 외에도 아름다운 꽃과 탐스러운 과실, 문자, 여러 가지 길상 무늬들이 화려한 색감의 물감으로 그려져 있으며, 보자기에 달린 두 개의 끈도 무늬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봉황문인문보는 마 소재의 직물로 만들어졌으며 한쪽면에만 무늬가 그려져 있습니다. 보자기 표면에 무늬를 그려 넣기에 앞서 끈끈한 성질의 무색 액체를 코팅하듯이 바르고 말리는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이는데, 보자기의 질감이 빳빳한 것은 이러한 처리 과정 때문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러한 과정 없이 직물 표면에 바로 무늬를 그린 인문보도 있는데 이러한 인문보는 얇은 직물의 뒷면으로 물감이 배어나와 안팎의 모양이 비슷합니다.
봉황문인문보에 그려진 무늬들은 대체로 부귀나 장수와 같은 상징적 의미가 담긴 것들로 구성되었습니다. 한자 목숨 수(壽)자와 복숭아는 장수를, 중국어 발음이 ‘길(吉)’과 같은 귤(橘)은 상서로움을, 박쥐는 행운과 복을 상징합니다. 이러한 무늬들이 보자기의 표면 가득히 그려져 있는데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정사각의 보자기면을 격자형으로 구획하여 한가운데에 날개를 펼친 모습의 봉황 한 쌍을 배치하고, 네 귀퉁이에는 화문(花紋)을 하나씩, 그리고 화문과 화문 사이에는 과실문과 보문(寶紋)을 각각 하나씩 나란히 배치하는 식입니다. 그런가 하면 가운데의 봉황문을 중심으로 일정한 간격으로 둥그렇게 무늬를 배치하고 배경을 작은 꽃무늬나 격자무늬로 채워 넣은 것도 있습니다. 종류도 다양하고 색깔도 제각각인 무늬들이 섞여 있지만 어지럽지 않고 단아한 느낌을 주는 이유는 무늬들이 이처럼 규칙적으로 배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암수 봉황은 음양(陰陽)의 화합과 금슬 좋은 부부를 상징하기도 하므로 봉황문인문보는 왕실 혼례와 관련된 물품으로 추정됩니다. 조선시대 기록에 따르면 왕실 가례 때 이불과 그림병풍을 싸는 데 인문보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보발기 중에 1882년 왕세자의 혼례 때 제작된 수백 장의 인문보 내역을 기록한 목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인문보 역시 왕실 혼례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보자기를 저마다 다른 모양으로 만들어낸 조선시대 장인과 화가들의 디자인 감각과 색채 감각에 경의를 표하며, 왕실의 경사스러운 날 수백 건이나 되는 인문보로 정성스레 포장한 귀한 물건들이 궁궐 안 어딘가에 놓여 있는 광경을 상상해 봅니다.
참고문헌
이홍주, 「궁중보자기의 쓰임과 제작」, 『궁중보자기』, 국립고궁박물관, 2015, pp. 262~293
이종숙(국립고궁박물관 유물과학과 학예연구관)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 속 왕실 유물 이야기>
국립고궁박물관은 매우 많은 수의 보자기를 소장하고 있습니다. 국립고궁박물관의 대표 소장품인 어보(御寶)와 어책(御冊) 등을 포장하여 보관하는 데 사용했던 수천 여 점의 보자기를 비롯해, 대한제국 황실에서 영친왕비에게 내려 준 장신구를 쌌던 색색의 비단보자기와 창덕궁에서 전래된 보자기에 이르기까지 이 모두를 합하면 국내 박물관 중 가장 많은 보자기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조선 왕실은 귀중한 물건을 포장할 때 보자기로 싸서 상자나 함에 넣고 그 함을 다시 보자기로 감싸 포장했습니다. 예를 들어 어보의 경우 홍색 비단보자기로 포장했는데, 먼저 어보를 보자기로 싸서 내함인 보통(寶筒)에 넣은 다음 그 보통을 보자기로 싸서 외함인 보록(寶?)에 넣고 그 보록을 다시 보자기로 감쌌습니다. 어보 하나를 포장하는 데에만 2개의 함과 3장의 보자기가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조선 왕실에서는 귀중한 물건 하나하나를 격식을 갖추어 정성스럽게 포장하는 문화가 발달했고, 그에 따라 많은 수량의 보자기가 제작되고 사용되었습니다.
조선 말기 궁중에서 제작하여 사용한 보자기의 목록인 보(?)발기에 보자기의 재질과 색깔·크기별 수량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물을 통해 혼례와 같은 중요한 왕실 행사에 수백 장의 보자기가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보발기 중에는 보자기 표면에 물감으로 여러 가지 무늬를 그려 장식한 ‘인문보(引紋?)’의 목록도 포함되어 있어서 인문보 역시 수백 장씩 제작되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인문보 유물은 14점에 불과합니다. 이 인문보 유물들은 창덕궁에서 전래된 것들로 일부 유물에는 과거에 물건을 쌌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인문보들은 모두 하나같이 보자기 정중앙에 마주 보고 있는 모습의 봉황 한 쌍이 그려져 있어서 ‘봉황문인문보(鳳凰紋引紋?)’로 불립니다. 봉황은 상서로움과 고귀함,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상징하는 상상의 새로 수컷을 ‘봉(鳳)’, 암컷을 ‘황(凰)’이라고 합니다. 중국 후한대에 편찬된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따르면 봉의 앞부분은 기러기, 뒤는 기린, 뱀의 목, 물고기의 꼬리, 황새의 이마, 원앙새의 깃, 용의 무늬, 호랑이의 등, 제비의 턱, 닭의 부리를 가졌으며, 오색(五色)을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봉황문인문보에는 봉황 외에도 아름다운 꽃과 탐스러운 과실, 문자, 여러 가지 길상 무늬들이 화려한 색감의 물감으로 그려져 있으며, 보자기에 달린 두 개의 끈도 무늬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봉황문인문보는 마 소재의 직물로 만들어졌으며 한쪽면에만 무늬가 그려져 있습니다. 보자기 표면에 무늬를 그려 넣기에 앞서 끈끈한 성질의 무색 액체를 코팅하듯이 바르고 말리는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이는데, 보자기의 질감이 빳빳한 것은 이러한 처리 과정 때문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러한 과정 없이 직물 표면에 바로 무늬를 그린 인문보도 있는데 이러한 인문보는 얇은 직물의 뒷면으로 물감이 배어나와 안팎의 모양이 비슷합니다.
봉황문인문보에 그려진 무늬들은 대체로 부귀나 장수와 같은 상징적 의미가 담긴 것들로 구성되었습니다. 한자 목숨 수(壽)자와 복숭아는 장수를, 중국어 발음이 ‘길(吉)’과 같은 귤(橘)은 상서로움을, 박쥐는 행운과 복을 상징합니다. 이러한 무늬들이 보자기의 표면 가득히 그려져 있는데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정사각의 보자기면을 격자형으로 구획하여 한가운데에 날개를 펼친 모습의 봉황 한 쌍을 배치하고, 네 귀퉁이에는 화문(花紋)을 하나씩, 그리고 화문과 화문 사이에는 과실문과 보문(寶紋)을 각각 하나씩 나란히 배치하는 식입니다. 그런가 하면 가운데의 봉황문을 중심으로 일정한 간격으로 둥그렇게 무늬를 배치하고 배경을 작은 꽃무늬나 격자무늬로 채워 넣은 것도 있습니다. 종류도 다양하고 색깔도 제각각인 무늬들이 섞여 있지만 어지럽지 않고 단아한 느낌을 주는 이유는 무늬들이 이처럼 규칙적으로 배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암수 봉황은 음양(陰陽)의 화합과 금슬 좋은 부부를 상징하기도 하므로 봉황문인문보는 왕실 혼례와 관련된 물품으로 추정됩니다. 조선시대 기록에 따르면 왕실 가례 때 이불과 그림병풍을 싸는 데 인문보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보발기 중에 1882년 왕세자의 혼례 때 제작된 수백 장의 인문보 내역을 기록한 목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인문보 역시 왕실 혼례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보자기를 저마다 다른 모양으로 만들어낸 조선시대 장인과 화가들의 디자인 감각과 색채 감각에 경의를 표하며, 왕실의 경사스러운 날 수백 건이나 되는 인문보로 정성스레 포장한 귀한 물건들이 궁궐 안 어딘가에 놓여 있는 광경을 상상해 봅니다.
참고문헌
이홍주, 「궁중보자기의 쓰임과 제작」, 『궁중보자기』, 국립고궁박물관, 2015, pp. 262~293
이종숙(국립고궁박물관 유물과학과 학예연구관)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 속 왕실 유물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