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중반 이후 중국 청(淸)의 한족 문인과 연경(북경)으로 사행을 간 조선 문인 사이의 교류가 활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19세기에는 조선의 대표적 문인인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젊은 시절 사행에 참가해 청의 저명한 노학자이자 관료인 담계(覃溪) 옹방강(翁方綱, 1733~1818)과 만나면서, 두 인물을 중심으로 한중 지식인의 교류가 확대되었습니다.
1810년 연행에서 옹방강과 인연을 맺고 김정희가 돌아 온 뒤, 서울 문인들 사이에서 옹방강에 대한 이야기가 회자되었으며 사행을 가는 문사들은 옹방강을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1812년 연행을 간 신위(申緯, 1769~1847) 또한 김정희의 소개로 옹방강을 만나고 그의 서재인 소재(蘇齋)를 방문하여 귀중한 여러 자료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옹방강과 인연을 맺은 김정희와 신위는 귀국 후 조선에서도 편지로 옹방강 그리고 그의 아들 옹수곤과 교유하였습니다.
김정희와 신위는 각각‘보담재(寶覃齋)’와‘소재(?齋)’를 당호(堂號)로 사용하며 담계 옹방강의 학문과 예술세계를 본받고자 하는 면모를 보였습니다. 19세기 대표적 두 문인의 옹방강에 대한 추숭은 당대 조선 문화계에 소재 당호 사용의 유행, 소식을 숭배하는 숭소열(崇蘇熱), 금석학의 발달 등과 같은 문화현상을 낳았습니다. 김정희는 순조의 왕세자인 효명을 교육하고 보좌하는 세자시강원 관원이었으며, 신위도 순조에서 헌종대에 걸쳐 고위관직에 있었기에 효명과 헌종과 같은 중요 왕실 인물도 옹방강의 학예(學藝)에 관심을 갖고 수용하고자 하였습니다. 1844~1845년경 헌종은 신위에게 옹방강의 서재 이름인‘석묵서루(石墨書樓)’로 편액을 써서 올리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이 때 신위는 왕방강의 손자가 보내 준 옹방강의 ‘석묵서루’인장을 함께 왕에게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국립고궁박물관에는 19세기 조선 왕실의 옹방강에 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는 현판 세 점이 전합니다. 모두 옹방강이 쓴 글씨를 새긴 것입니다. 이중 <실사구시(實事求是)> 현판은 “사실에 토대를 두어 진리를 탐구함”이란 뜻의 ‘실사구시’를 크게 쓰고 그 옆에 작은 글자로 “옛 것을 고찰하고 현재를 증명하니,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사실을 밝히는 것은 책이고, 이치를 따지는 것은 마음에 있네. 하나의 근원은 둘이 아니니, 나루터에서 찾을 수 있네. 만 권 서적을 관철함은 다만 이 잠규(規箴)라네”는 글을 적고 있습니다. 이어서 가경(嘉慶) 신미년(辛未, 1811) 10월 옹방강이 썼다는 관서와 ‘담계,’‘옹방강인’인장을 새겼습니다.(그림 1)
청대 발달한 고증학은 실사구시 정신에 토대하였고, 이에 금석학은 경학·문자학·사학·서예에 있어 필수 기초 학문이 되었습니다. 청대 금석학의 대가인 옹방강의 고증 정신과 그의 서체를 잘 보여주는 현판이라 하겠습니다. 이 현판은 창덕궁에서 전해진 것으로 어느 전각에 걸렸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한편, 경복궁 건청궁 장안당의 출입문인 초양문(初陽門)과 집옥재 남쪽 별당인 보현당(寶賢堂)의 현판은 조선말인 고종 대까지 이어진 옹방강에 대한 추숭 열기를 보여줍니다. (그림 2·3)
손명희(유물과학과 학예연구관)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 속 왕실 유물 이야기'>
18세기 중반 이후 중국 청(淸)의 한족 문인과 연경(북경)으로 사행을 간 조선 문인 사이의 교류가 활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19세기에는 조선의 대표적 문인인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젊은 시절 사행에 참가해 청의 저명한 노학자이자 관료인 담계(覃溪) 옹방강(翁方綱, 1733~1818)과 만나면서, 두 인물을 중심으로 한중 지식인의 교류가 확대되었습니다.
1810년 연행에서 옹방강과 인연을 맺고 김정희가 돌아 온 뒤, 서울 문인들 사이에서 옹방강에 대한 이야기가 회자되었으며 사행을 가는 문사들은 옹방강을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1812년 연행을 간 신위(申緯, 1769~1847) 또한 김정희의 소개로 옹방강을 만나고 그의 서재인 소재(蘇齋)를 방문하여 귀중한 여러 자료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옹방강과 인연을 맺은 김정희와 신위는 귀국 후 조선에서도 편지로 옹방강 그리고 그의 아들 옹수곤과 교유하였습니다.
김정희와 신위는 각각‘보담재(寶覃齋)’와‘소재(?齋)’를 당호(堂號)로 사용하며 담계 옹방강의 학문과 예술세계를 본받고자 하는 면모를 보였습니다. 19세기 대표적 두 문인의 옹방강에 대한 추숭은 당대 조선 문화계에 소재 당호 사용의 유행, 소식을 숭배하는 숭소열(崇蘇熱), 금석학의 발달 등과 같은 문화현상을 낳았습니다. 김정희는 순조의 왕세자인 효명을 교육하고 보좌하는 세자시강원 관원이었으며, 신위도 순조에서 헌종대에 걸쳐 고위관직에 있었기에 효명과 헌종과 같은 중요 왕실 인물도 옹방강의 학예(學藝)에 관심을 갖고 수용하고자 하였습니다. 1844~1845년경 헌종은 신위에게 옹방강의 서재 이름인‘석묵서루(石墨書樓)’로 편액을 써서 올리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이 때 신위는 왕방강의 손자가 보내 준 옹방강의 ‘석묵서루’인장을 함께 왕에게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국립고궁박물관에는 19세기 조선 왕실의 옹방강에 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는 현판 세 점이 전합니다. 모두 옹방강이 쓴 글씨를 새긴 것입니다. 이중 <실사구시(實事求是)> 현판은 “사실에 토대를 두어 진리를 탐구함”이란 뜻의 ‘실사구시’를 크게 쓰고 그 옆에 작은 글자로 “옛 것을 고찰하고 현재를 증명하니,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사실을 밝히는 것은 책이고, 이치를 따지는 것은 마음에 있네. 하나의 근원은 둘이 아니니, 나루터에서 찾을 수 있네. 만 권 서적을 관철함은 다만 이 잠규(規箴)라네”는 글을 적고 있습니다. 이어서 가경(嘉慶) 신미년(辛未, 1811) 10월 옹방강이 썼다는 관서와 ‘담계,’‘옹방강인’인장을 새겼습니다.(그림 1)
청대 발달한 고증학은 실사구시 정신에 토대하였고, 이에 금석학은 경학·문자학·사학·서예에 있어 필수 기초 학문이 되었습니다. 청대 금석학의 대가인 옹방강의 고증 정신과 그의 서체를 잘 보여주는 현판이라 하겠습니다. 이 현판은 창덕궁에서 전해진 것으로 어느 전각에 걸렸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한편, 경복궁 건청궁 장안당의 출입문인 초양문(初陽門)과 집옥재 남쪽 별당인 보현당(寶賢堂)의 현판은 조선말인 고종 대까지 이어진 옹방강에 대한 추숭 열기를 보여줍니다. (그림 2·3)
손명희(유물과학과 학예연구관)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 속 왕실 유물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