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과 종묘 알아보기 [창경궁] -2-

궁궐길라잡이
2017-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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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전과 경춘전kyungchunjun2.jpg
경춘전(景春殿)과 환경전(歡慶殿)은 서로 어슷하게 내외하듯 쳐다보고 앉아 있다. 가려줄 담도 없이 터줄 문도 없이 덩그러니 앉은 품이 어색하다.순조 때 화재가 나 새로 지었을 때만 해도 온전하였으나 일제 때 창경원이 되면서 방을 뜯어내고 통마루를 깔아 전시관으로 쓰면서 본모습을 잃었다.환경전 남쪽의 잔디밭은 지금은 없는 옛 건물의 무덤이고 그 잔디밭 위에 선 석탑은 창경원 시절에 조경용으로 그냥 옮겨 놓은 것이라 한다. 사람의 온기 없이 찬바람만 도는 이 곳도 예전엔 건물들이 서로 어깨를 기대고 건물을 둘러싼 담과 문이 사람의 삶을 감싸고 숨쉬게 하던 곳이었다.
hwankyungjun2.jpg한창 때 경춘전은 인수대비의 말년의 삶과 인현왕후의 죽음, 그리고 혜경궁 홍씨의 아들, 정조의 출생을 바라보기도 하였다. 환경전은 왕과 왕세자 등 남자들이 주로 사용했던 곳으로 중종과 소현세자가 여기서 죽음을 맞았다.



통명전과 양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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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없는 문을 지나고 담 없는 담을 넘어가면 구중궁궐의 가장 깊
숙한 곳, 통명전(通明殿)을 만나게 된다. 통명전은 중궁전, 즉 왕비의 처소로서 다른 궁궐의 중궁전처럼 지붕에 용마루가 없다. 내전의 큰 행사를 위하여 마당에 조정과 같이 박석을 깔아놓고 높고 넓다란 기단인 월대를 설치한 점에서 왕비의 위신과 그에 대한 배려를 읽을 수 있다. 왕비에 대한 특별한  배려는 국모로서 왕비가 해야 했던 의무의 대가이다. 왕비는 누에를 치고 포를 짜는 등 국모로서 모범이 되는 행동을 하고, 궁궐 안으로는 궁녀에서 후궁에 이르는 많은 여인들과 궁궐 밖으로는 관료들의 부인들을 아우르는 내,외명부를 다스리는 바쁜 삶을 살았다. 한편 왕비는 궐 밖 출입이 자유롭지 않은 갇혀 사는 존재이기도 했다. 그러한 왕비를 위한 뜻으로 통명전 옆에는 난간을 두르고 괴석으로 장식한 못인 연지가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다.



yanghwadang2.jpg통명전 옆에 있는 양화당(養和堂)은 통명전보다 단출하고 규모도 작다. 이 건물은 인조가 병자호란 이후 머물렀던 곳이며, 철종 비인 철인왕후가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영춘헌과 집복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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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당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영춘헌과 집복헌이 있
다. 집복헌은 영춘헌의 서행각이다. 영춘헌은 정조가 승하한 곳이며, 집복헌에서는 사도세자와 순조가 출생하였다.
그러나 일제시기 이후 창경원의 관리사무소로 쓰이면서 그 모습
이 크게 변형되어 최근에 복원을 하였다. 그런데 1820년대 후반의 그림인 동궐도에서 보이는 영춘헌과 집복헌의 모습은 20세기 초의 동궐도형(창덕궁과 창경궁을 도면으로 제작한 것)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지금의 복원된 건물은 동궐도형의 모습에 기초한 것으로 보인다.

자경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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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당 옆 계단을 올라가면 창경궁 전체가 펼쳐보이는 전경이 잠시 발길을 멈추게 한다. 창경궁에서 가장 높은 이 지대에는 90년대 중반까지 왜식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을 헐려 소나무만 울창하다. 조선시대 때 이 곳에는 자경전이 있었다. 자경전(慈慶殿)은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지은 건물로 옆으로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사당이었던 경모궁, 지금의 서울대 병원을 바라보고 아래로는 사도세자가 태어나고 정조가 죽음을 맞은 영춘헌과 집복헌을 굽어본다. 자경전 터에선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관리사무소 옆, 서울대 병원 쪽으로는 월근문이라는 작은 문이 있는데, 경모궁에 자주 들르던 정조가 만든 문이다. 이 문을 통해 매달 부지런히 아버지의 영혼을 뵙고자 했던 정조의 마음과 궁궐의 정문 홍화문을 통해 가는 공식적인 행차로 사람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으려던 세심한 배려를 느낄 수 있다.
sundial.jpgpung2.jpg자경전 터에서 춘당지에 이르는 길에는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재던 기구인 풍기대와 해시계인 앙부일구(모조품)가 있다. 이처럼 궁궐 안에는 자격루, 측우기, 간의 등과 같은 과학 기구가 많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는 국왕이 국정 운영을 위해 자연 현상을 잘 살피고 책임지라는 이야기가 될 터이다.

 

성종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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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경전 터에서 내려오다가 왼편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가면 성종의 태실과 태실비가 있다. 조선시대에서는 왕실의 태를 없애지 않고 조선 최고의 백자 안에 넣어 봉하고 다시 큰 항아리에 넣은 후 태실을 조성하여 보관을 한다. 이렇게 하여 전국 각지의 길한 땅에 태실과  관련 내용을 기록한 태실비가 존재했었다. 그런데 일제 시기에 일본인들이 전국 각지의  태실을 경기도에 있는 서삼릉에 한꺼번에 모아 놓고 상당수의 좋은 항아리들을 빼돌렸다고 한다. 그러나 성종 태실의 석물만은 창경궁에 가져다 놓았는데, 그 이유는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들다.

춘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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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경전 터에서 내려오면 보이는 커다란 연못인 춘당지(春塘池)는 동궐이 기대앉은 응봉의 물을 끌어들여 잠시 품었다가 금천으로 흘려보낸다. 그러나 현재 춘당지는 본모습이 아니다. 현재 춘당지는 네모반듯한 조선시대 인공못과는 달리 우둘투둘한 호리병 모양이다.  자경전 터에서 내려와 바로 보이는 것은 원래 춘당지가 아닌 내농포라는, 왕이 농사 시범을 보이던 논이 있던 자리이다. 못가를 한참 둘러가면 작은 다리가 나오는데 그 위쪽 연못이 모습은 약간 바뀌었지만 원래의 춘당지이다. 일제시대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격하시키면서 내농포를 파내고 원래 춘당지에 잇대어 못을 만들어 놀잇배를 띄우고 놀았다고 한다.
춘당지 너머 북쪽으로 힐끗 보이는 유리건물은 아직 남아있는 식물원의 흔적, 대온실이다. 원래 조선시대 춘당지와 그 북쪽 일대에는 창경궁과 창덕궁의 구별 없이 원유 공간이 펼쳐져 있었고, 이를 후원, 북원, 또는 금원이라 불렀다. 후원은 단순한 휴식 공간만이 아니라 과거시험이나 군사 훈련, 활쏘기, 종친 모임, 왕의 농사 시범 등이 열리는 다목적 공간이다. 그러나 일제는 이곳에 ‘비원’이라는 잘못된 이름을 붙인 후 그저 흥청망청 놀기만 했던 곳처럼 보이려고 원래의 모습을 변형시켰고, 창덕궁에 황제가 살고 있었음에도 관람객을 마구 끌어들여 이 공간을 망가뜨렸다. 이 이름이 아직까지 없어지지 않고 끈질기게 남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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