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과 종묘 알아보기 [창경궁] -1-

궁궐길라잡이
2017-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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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昌慶宮)은 성종이 당시의 세 대비, 곧 세조 비 정희왕후 윤씨, 덕종 비 소혜왕후 한씨, 예종 비 안순왕후 한씨를 위해,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 머물렀던 수강궁 자리에 1483~1484년에 걸쳐 세운 궁궐이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연결되어  동궐이라는 하나의 궁역을  형성하면서  동시에 독자적으로도 궁궐로서의 완결성을  갖고 있었으므로 그 자체로도 궁궐로서 필요한 공간 구조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 에서 법전인 명정전까지는 그 규모나 격식 면에서 창덕궁보다 격이  낮게 조성되었음이 눈에 띈다.

이것은 그 거리가  짧고 중간의 문도 생략되어 있으며, 축도 남향(南向) 이 아닌 동향(東鄕)을 하고 있는데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외전과 궐내각사는 빈약한데  반하여 내전과 생활 주거 공간은 상대적으로 발달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창경궁이 왕의 정치와 행정, 제의(祭儀) 등 공식성이 강한 활동을 위한 공간은 미약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창경궁은 독립적인 궁궐의 역할과 동시에 창덕궁의 모자란 주거공간을 보충해주는 상호보완적 역할을 하였으며 그래서 창덕궁과 더불어 동궐로 불리기도 하였다. 창경궁은 임진왜란으로 완전히 불탄 이후 광해군에 의해 중건되었으나, 인조반정 이후 일어났던 이괄의 난으로 다시 상당히 망가졌다. 이렇게 되자 서궐로 지어졌던 인경궁의 건물을 헐어다 옮겨 짓는 방식으로 궁궐을 보수했다. 1633년 7월 인조는 창덕궁에서 창경궁으로 이어했다. 순조 연간의 화재로 다시 크게 훼손된 이후 수리를 거친 창경궁은, 일제시대 창경원으로 격하되면서 박물관이 들어서고 담이 헐리면서 내전 건물의 바닥은 모두 마루로 바뀌어 전시 공간으로 활용됐으며, 남쪽에 동물원과 북쪽에 식물원 등이 설치되어 일반인에게 놀이터로서 개방되었다.

해방 후에도 산업화로 팽창되는 서울의 부족한 휴식 공간을 채워주기 위해  창경궁의 희생을 강요했고, 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창경궁’이라는 제 이름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찾은 것은 이름 뿐, 빼곡이 건물이 들어차 있던 제 모습은 더 이상 찾을 길이 없다.
 현재의 창경궁은 수난을 겪고 최근 약간 복원된 모습이다. 견뎌낸 세월과 고난만큼 왕에서 이름 없는 궁녀들에 이르기까지 그 속에 살았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창경궁은, 사람 사는 집인 동시에 국가를 경영하는 최고의 관청인 궁궐로서 역사를 말해주는 살아있는 박물관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홍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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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의 정문은 홍화문이다. 남쪽으로 관리들이 드나드는 선인문, 북쪽으로는 월근문과 성균관에 넘나드는 집춘문까지 많은 문을 거느린 창경궁의 얼굴로서, 명정문, 명정전과 함께 광해군 때인 1616년에 지어진 것이다. 정면 3간에 중층으로 되어 있는 이 문은 경복궁의 광화문이나 창덕궁의 돈화문보다는 소박한 규모이지만 날렵하고 어여쁜 맛이 있다. 홍화문과 인연이 많은 임금은 영조와 숙종이다. 홍화문 앞에서 영조는 백성들을 만나 정책에 대한 의견을 묻기도 하였고 쌀을 나누어주기도 했다.

옥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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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화문을 들어서면 작은 내가 보인다. 모든 궁궐에 이러한 내가 있는데  이를 금천(禁川)이라 부른다. 내는 안과 밖을 가르고 부정함을 씻어낸다. 금천 위에 자리잡은 작지만 야무진 돌다리가 옥천교이다. 다리 양옆의 귀면과 네 난간에는 돌짐승 조각이 빈틈없이 사위를 지켜 행여 잡인과 잡귀가범접할까 눈을 부릅뜬다. 금천은 이외에도 명당수로서의 의미, 삿된 욕심을 씻어내 맑은 마음으로 정사에 임한다는 의미, 궁궐에 필요한 물을 얻고 내보내는 실용적인 의미를 품고있다.

명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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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정전(明政殿)은 왕의 존엄을 나타내고 각종 의식을 치르는, 궁궐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법전(法殿)이다. 다른 궁궐에도 모두 법전이 있지만 명정전은 조금 독특하다. 중층으로 된 경복궁의 근정전, 창덕궁의 인정전과 달리 단층에 아담한 규모이다. 또 홍화문과 명정문 사이에 문이 없고 창덕궁처럼 동선이 꺾여있지 않아 홍화문을 들어서면 명정전이 바로 보인다. 대개가 남향인 다른 법전과는 달리 동향을 하고 있는 것도 색다른 점이다. 명정문을 들어서면 아늑하게 펼쳐진 마당, 조정(朝廷)이 나온다. 조정에는 넓적한 돌인 박석을 깔아 다른 곳과 차별화하고 격을 높인다.
조정의 가운데로 홍화문부터 시작해 명정전을 향해 쭉 이어진 세 마디 길, '삼도'가 길을 안내한다. 비석처럼 쭉 늘어선 '품계석'은 관급별로 늘어서 읍하고 있을 신하들을 위한 것이다. 계단을 올라 명정전 안을 들여다보면 처음에는 실망하기 쉽다. 이 집은 사람이 쓰지 않은지 100여 년이 흘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을 활짝 열어 화강암에 반사되어 들어오는 빛을 받고 명정전 앞 넓다란 월대에서 악공들이 연주하는 유장한 음악을 들으며, 뒷면의 일월오봉병이라는 병풍과 머리 위의 닫집과 천장에 달려있는 나무로 만든 봉황의 호위를 받으며 왕이 앉아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 이 건물의 제모습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밖으로 눈을 돌려 명정전 양옆을 보면 넓적한 독이 있는데 이를 '드므'라 부른다. 드므에 물을 담아놓으면 화마가 물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놀라 달아난다는 옛 사람들의 생각이 재미있다.

문정전과 숭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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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정전 옆에 등을 기대어 앉아 남산을 마주 보는 문정전(文政殿)은 왕의 사무용 건물, 편전이다.
왕은 이곳에서 신하들과 함께 국사를 논의하였다. 이 건물은 법전인 명정전과 달리 남향을 하고 있고,기둥도 천원지방(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의 원리에 따라 보통 원기둥보다 격이 낮은 4각기둥을 쓰고있다. 이 건물은 1986년에 복원을 한 것으로, 원래의 문정전은 일제 시기에 없어졌다. 문정전 앞의 조그만 마당에 있는 몇 개의 주춧돌은 1820년대 후반의 그림인 동궐도에서 보이듯이 문정문에서 문정전까지 연결된 복도의 흔적으로 추측된다. 원래 주요 건물은 복도로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명정전, 문정전, 숭문당과 내전으로 향하는 빈양문에 이르는 공간이 복도로 연결이 되어 있음을 지금도 직접 확인해볼 수 있다.
sungmun.jpg명정전 뒷편에 자리잡은 숭문당(崇文堂)은 영조의 어필이 걸려 있으며 왕이 가끔 학자들을 불러 학문을 논하고 대화를 나누던 곳이다. 그러한 탓인지 숭문당은 공식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명정전이나 문정전에 비해 규모가 작고 단청도 소박하다. 숭문당은 지붕을 받치는 둥근 서까래만 있는 홑처마이며 잡상도 없는 등 전체적으로 소박한 외관을 하고 있다. 지금의 숭문당은 순조 연간에 화재가 나서 다시 지은 것이다.

함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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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문당 오른편 빈양문(賓陽門)을 넘어서면 왕과 왕비의 기거 활동 공간인 내전이 펼쳐진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물은 정자인 ‘함인정(涵仁亭)’이다. 함인정은 사면이 모두 트인 형태의 정자로 정자로서는 규모가 큰 편이다. 천장을 보면 가운데가 우물천장으로 되어 있고 둘레는 서까래가 다 드러나 있으며, 내부 바닥에 깐 마루도 중앙부가  둘레보다 한 단 높이 설치되어 있는 등 가운데와 둘레의 구별이 보이는 구조로 되어 있다. 영조는 함인정에서 문무과에 급제한 인재들을 만나보기도 하였다 한다. 함인정 내부의 사면에는 사계절에 관한 시, ‘사시(四時)’가 춘하추동 한 구절씩 방위에 맞춰 동남서북에 배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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