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과 종묘 알아보기 [창덕궁] -3-

궁궐길라잡이
2017-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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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훈각/수라간suragan.jpg
대조전 서쪽으로는 내부 벽면이 타일로 마감되어 있는 건물이 있는데, 왕실의 부엌인 수라간이다. 하지만 서양식으로 만들어져 보기 좋지 않다. 1917년 대조전에 불이 날 때 그 서쪽 일대까지 번졌고, 그것을 일본인들이 다시 지으면서 서양식-일본식으로 개조하기도하였고 또 순종이 1926년까지 이 일대에 살면서 개조하기도 하였다. 타일로 처리된 건물은 그렇게 양식 부엌으로 개조된 결과로 남은 것이다.
kyunghoongak1.jpg대조전 뒤쪽에 있는 건물이 경훈각이다. 지금은 일층 건물이지만 원래는 이층 건물로서, 이층 건물일 경우 일층은 “각” 이층은 “누”로 이름을 별도로 붙이는 관례에 따라 일층이 “경훈각,” 이층은 “징광루”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그것을 1917년 화재 이후 다시 지으면서 일층으로 만들어 버렸다. 본래 경훈각은 정면 5칸의 2층 건물이었으나 현재는 정면 9칸 측면 4칸의 단층 건물로 되어버렸다. 대청의 동쪽 벽에는 “조일선관도”가 서쪽 벽에는 “삼선관파도”가 그려져 있는데 대조전과 희정당의 그림과 같이 1920년에 제작된 것이다.

성정각 (내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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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정당 동쪽 곁에 있는 건물의 이름은 성정각이다. 성정이란 말은 “성의와 정심”의 앞글자에서 따온 것으로 성의란 뜻을 순수하게 집 중하는 것이요, 정심이란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건물은 왕이나 왕세자가 이런 자기 훈련을 하던 곳이다. 왕이 학자들 과 책을 공부하며, 정책 토론, 곧 경연을 열거나 왕세자가 선생님들 과 공부를 하는 곳, 곧 서연을 열던 곳으로 자주 쓰였다. 문 이름도 영현문(현인을 맞이하는 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앞에 안내판에는 “내의원”이라 소개되고 있다. 애초에 내의원은 인정전의 서쪽 지금 일본식 창고건물이 있는 부근에 있었는데 이 건물이 왜 내의원이 되었을까? 이곳이 순종이 이 일대에 살던 일제시기에는 내의원으로 쓰였기 떄문에 이렇게 소개하는 게 아닌가 짐작된다. 따라서 궁궐 본연의 모습을 알리지 못하고 일제시대에 어떻게 쓰였나를 설명한다는 것은 그 의식이 아직도 일제시대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하였음을 보여주는 나쁜 사례로 볼 수 있다.

성정각은 그나마 사방으로 문을 꼭 걸어닫아 행랑채 너머로 담장 너머로 발돋움을 해야 겨우 중허리까지만 볼 수 있다. 성정각은 본채에 덧붙여 누가 번듯하게 솟아 있다. 남쪽 편에 붙은 편액의 누 이름이 “희우루”인데 동쪽에는 또 “보춘”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가뭄에 단비를 맞기도 하고 또 동쪽에서부터 전해오는 봄기운을 맞기도 하려는 염원인가 헤아려진다. 성정각에 기대어 보면 남쪽에 길게 뻗은 행랑채에 “조화어약”, “보호성궁”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왕의 약을 지어 임금님의 몸을 보호한다는 뜻 일텐데, 원래는 내의원에 붙어 있던 것을 일제시기에 이곳이 내의원으로 쓰이면서 옮겨와 단 것으로 보인다. 마당에는 약재를 빻던 돌절구도 놓여 있다.

관물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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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정각 뒷편으로도 꽤 큰 건물이 한 채 있다.


성정각의 북쪽에 있는 관물헌은 동궐도에서는 “유여청헌”이라 하였으며, 정조대에 창덕궁을 수리할 때에 관물헌도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 건물은 최소한 1830년 이전에 건립된 건물이다. 이 건물은 고종 21년(1884)에 개화파에 의해 갑신정변이 벌어졌던 곳이기도 하다.

편액은 달랑 '집희'두글지만 써 있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편액 글씨치고는 서툰 글씨이다. 갑자년에 쓴 어필로 표기되어 있다. 갑자년이라면 1864년 고종원년이고 그해 고종은 열세 살이었다.
열세 살짜리 소년왕이 무언가 기념해서 편액을 쓴 듯하다. "집희"란 "빛남 밝음 인격이 계속하여 오래 빛남이라”는 뜻과 "계승하여 넓힘"이라는 뜻이 있다. 건물 이름 끝자로는 대개 "전, 당, 합, 각, 재, 헌, 루, 정" 가운데 하나가 붙게 마련인데 단지 '집희'라고만 했으니, 집희전은 아닐테고 집희당이라는 것인지 집희각이라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혹은 건물 이름이 아니라 “이 건물에 사는 사람의 인격이 오래 빛나기를” 바란다거나 아니면 자신이 새로 왕이 되었으니 왕위를 계승하여 밝히겠다는 의지의 표명인지 모르겠다.

이 건물의 본 이름은 '관물헌'이다. 왕이 이런저런 형식으로 신하들을 만나고 또는 경연을 열고하는데 어느 한 건물에서 그런 일을 모두 처리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건물들을 옮겨 다녔다. 그렇게 왕이 주로 활동하는 공간이 내전의 주요 부분을 형성하는 것이 창덕궁의 건물로는 희정당, 성정각, 관물헌이 그에 포함된다.

빈청(어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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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전에서 인정문으로 되돌아 나와 왼쪽으로 꺾으면 숙장문이다. 숙장문을 들어서면 바로 오른편으로 '어차고'라고 안내판이 설치된 건물이 있다. 전면이 유리창으로 된 건물안에는 초헌, 연과 여 같은 가마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 가운데는 프랑스제 마차도 있다. 1997년까지는 1909년산 영국 다임러 자동차와 1903년산 미국 제너럴 모터스 회사의 캐딜락자동차도 있었는데 1997년 말에 현대자동차에서 수리, 복원을 하기 위해 가져갔다고 한다. 그런데 궁궐에 자동차 차고가 있고 유리창이 있고...
이곳이 이렇게 전시용 차고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일제시기에 들어오면서부터이다. 원래 이 건물의 이름은 “비궁청”이라는 이름의 “빈청”이었다. “빈청”이란 비변사 당상들, 다시 말하면 정승 판서급의 고위 신하들이 왕을 만나뵈러 궁궐에 들어왔을 때 또는 만나고 나와서 자신들끼리 현안을 논의하던 건물이다. 궁궐에 드나들던 관원들 가운데서 가장 고위 관원들의 공간이요, 그런 점에서 궐내각사 가운데 가장 격이 높은 건물이었다. 그런 빈청을 “어차고”로 만든 것은 우연이 아니다. 조선궁궐과 정치문화를 능멸하고 부정하는 일제의 치밀한 계산이 깔려있다. 그런 곳을 아직도 어차고라고 설명하고 있는 안내판에는 아직도 일제시대가 연장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어차고에 전시된 것 가운데 주정소라고 하는 물건에는 특별히 관심을 기울일 만하다. 안내문에는 정조 임금이 아버지 사도세자 무덤인 화성의 현륭원에 참배갈 때 도중에 쉬던 시설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이 꼭 정조가 쓰던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으나 그 모양이나 거기 새겨진 문양 등을 보더라도 어떤 왕이 썼던 간에 왕이 궁궐 밖으로 행차할 때 쓰던 것이라는 사실은 확실하다고 하겠다. 왕 전용 이동조립식 휴게실인 셈이다.

가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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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전 뒤뜰 화계 위의 담에는 전돌로 축조된 추양문과 천장문이 있고 그 북쪽의 넓적한 뜰에 “가정당”이 있다. 이 건물은 “동궐도”와 (궁궐지) 그리고 “동궐도형”에도 표현되지 않은 건물이며 조선시대 건물을 일제시대 초에 옮겨 세운 것으로 보고 있으나 경운궁(덕수궁)에 있던 가정당을 이건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덕수궁의 가정당은 중화전 북쪽에 있는 즉조당과 석어당의 북쪽에 있던 건물로서 고종  광무 8년(1904)의 화재 때에도 무사하였고 1919년
1월 21일에 함녕전에서 고종이 승하할 때까지는 덕수궁이 궁궐로서 사용되었다.

건물의 주위는 수목과 경관이 수려하고 궁궐 내전 뒤쪽에 높직한 대지에 자리하면서도 밖으로 노출되지 않아 한적하고 밝은 분위기가 별당지로서는 일품이다.

함원전
대조전의 뒤쪽에 동쪽으로 접속된 건물인 함원전은 경복궁의 교태전에 접속되었던 “건순각”과 같은 모습이지만 건물의 칸 수와 기둥 간격은 약간 변형되어 있다. 대조전을 중건하면서 경복궁의 건물과는 다르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본래는 함원전 대신에 그 동쪽으로 별도의 건물인 “집상전”이 있었는데 인조 25년(1647)에 집상당을 건립하였고 그 뒤 현종 8년(1667)에 모후인 인선대비를 위하여 경희궁의 집희전을 옮겨 짓고 집상전이라 하였다. 궁궐에서는 대비전을 중궁전의 동북쪽에 세우는 규범에 따른 것이다. 동궐도에서는 집상전도 대조전과 같이 지붕에 용마루가 없는 건물로 그려져 있으나 동궐도형에서는 빈터만 표현된 것과 궁궐지의 기록을 참조하면 순조 33년의 화재로 소실된 뒤로는 중건되지 않았으며 1920년의 중건 때에는 집상전 대신에 함원전을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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