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과 종묘 알아보기 [창덕궁] -2-

궁궐길라잡이
2017-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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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문 안팎in&outofinjung.jpg
금천교를 건너 진선문을 들어서면 건너편 동쪽에는 “숙장문” 북쪽에는 “인정문” 남쪽에는 긴 행랑이 둘러싸고 있는 넒은 마당이 있 다. 진선문 좌우의 행랑과 남쪽 행랑은 병조에서 궁궐을 지키기 위 해 파견된 분실이라 할 “내병조”, 왕의 의복과 궁궐에서 쓰는 보물 과 인장등을 관리하는 “상의원”, 왕이 참여하는 큰 행사에 장막을 치는 일을 담당하는 “전설사” 등이 들어있는 궐내각사의 연장이다. 그중 진선문과 숙장문은 일제에 의해 사라졌으나, 1996년 복원공사를 해 지금은 재건되었다. 진선문을 들어서서 만나는 네모난 넓은 마당은 즉위식이나 각종 큰 잔치 혹은 중대한 재판을 진행하던 곳으로, 곧 궁궐 안의 광장인 셈이다. 왕들은 이 마당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인정문을 들어가 인정전 용상에 앉음으로써 왕이 되었다.

인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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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문은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문이 셋으로 되어 있고 가운데 큰문은 왕의 출입문인 어문이다. 동쪽은 문인, 서쪽은 무인들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태종 5년에 인정전과 같이 창건되고 임진왜란 때에 소실된 것을 광해군 때 중수하였고 영조 20년(1744)에 소실되었다가 이듬해 재건된다. 현재의 건물은 영조 21년에 건립한 것으로 보고 있으나, 지금의 모습은 1912년경에 인정전의 행각을 전시장으로 만들면서 전시장 출입문의 기능으로 바꾸기 위해 벽체와 바닥의 구성을 인정문을 들어서서 바로 회랑의 전시장으로진입할 수 있도록 일제가 변형시켜 놓은 것이다. 인정문의 편액은 검정 바탕에 흰글씨로 양각하였고 선조때의 명필인 “북악 이해룡”의 글씨라 한다.

인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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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전은 창덕궁의 법전이다.

태종 5년의 창덕궁 창건 때에 건립된 것을 태종 18년(1418)에 고쳐 짓도록 하여 7월 착수되고 같은 해인 세종 즉위년 9월에 준공된다그 뒤 36년이 지난 단종 때에 해체보수공사가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광해군 떄에 중건된다. 1623년 인조반정 때에는 인정전만은 화재를 당하지 않았다. 정조 6년(1782)에는 이전에 없던 품계석을 인정전 앞뜰에 설치하였고 이 품계석은 다른 궁에도 설치하게 되었다.
그 뒤 순조 3년(1803)에는 다시 소실되고 이듬해에 중건된다. 50여년 뒤인 철종 7년(1856)에는 건물이 퇴락하였다는 이유로 또 한차례 완전히 해체하여 보수공사를 시행하였으나 건물의 형태에는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보고 있으므로 현존하는 건물의 골격은 순조 때의 것으로 볼 수 있다.
창덕궁에 서양식 가구와 실내장식이 도입되는 1908년 무렵 인정전의 내부에 커다란 변화가 생긴다. 회흑색의 전돌로 깔린 실내바닥을 서양식 쪽널마루로 만들고 전등이 설치되었다. 출입구를 제외한 창문 아랫부분의 외벽에 전벽돌로 쌓았던 화방벽이 철거되고 대신에 목재의 큼직한 머름대와 궁판으로 바뀌었다. 또 창문 내측에 별도의 오르내리창이 설치되며 휘장을 설치하기 위한 커튼 박스도 만들어지고 지붕의 용마루에는 이왕가를 상징하는 배꽃문장으로 장식하여 왕궁이 아닌 가문의 건물로 격하시켰다.



여기서 잠깐 오얏무늬 모양의 휘장에 대해 살펴보자. 대한제국부터 오얏꽃은 황실의 문장처럼 쓰였다. 대한제국의 두 번째로 격이 높은 훈장 이름도 “이화대훈장”이었고 문서나 복식에도 이화문양이 자주 보인다. 하지만 우리 건물 어디에도 이런 식으로 용마루에 장식을 한 예는 없다. 따라서 인정전의 구리로 된 오얏무늬라든지 지붕 용마루의 오얏무늬라든지 이런 것은 아마 일본인들이 하지 않았을까 싶다.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순종을 “이왕” 고종을 “이태왕”이라 불렀고 망한 나라의 왕실을 이왕가, 이왕실이라 불렀고 또한 조선을 일개 “이씨의 나라”(일본은 옛부터 여러개 성씨가 군주인 나라로 나눠져 있었다.)로 생각하고 이씨조선 “이조<李朝>”, 즉 천황이 다스리는 여러 왕들 중 하나 정도라고 말하였다. 따라서 이조란 말은 절대 좋은 말은 아닐 터이다.

인정전의 건물구조를 보면 정면 5칸 측면 4칸해서 20칸 건물로 창덕궁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용마루 양끝에는 취두를 내림마루와 추녀마루에는 용두를 놓고 추녀마루 끝에는 잡상을 아홉개씩 놓았다. 내부 역시 이에 걸맞는 차림을 하고 있다. 겉에서 보기에 지붕이 2층이지만 속은 한층으로 터져 있어 넓고도 높은 공간이다.

월대에는 전면과 좌우 측면에 계단이 있으며 전면부의 어계의 앞면에는 당초문을 조각하였고 그 중앙부의 답도에는 봉황을 새겨 놓았다. 봉황은 인정전 내부의 중앙 천장에도, 보좌 위의 닫집에도 새겨져 있으며 고종이 황제로 등극한 뒤에 경운궁(덕수궁)의 중화전에 새겨진 용과 비교된다. 인정전의 편액은 검정 바탕에 흰 글씨로 양각되었고 액자는 칠보문을 그렸다. 액자의 네 귀는 구름모양으로 조각되었고 현판의 글씨체는 “서영보”의 솜씨라 한다.

선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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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전에서 동쪽으로 위치한 건물이 선정전이다. (현재 새로 복원

된 선정전은 당시와는 차이가 있다.)

이곳은 왕이 신하들을 만나 국사를 논의하고 학자관료들과 유교경 전과 역사책을 공부하기도 하고 유생들을 불러모아 실험을 보기도 하고 잔치를 베풀기도 하는 공식 집무실-편전이다. 법전인 인정전의 동쪽에 뒤로 약간 물러나 앉아 규범을 지키되 주변환경에 적합하도록 적응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 용도가 중요해서 그런지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궁궐 건물 중 유일하게 청색 기와의 건물이다.

세조 7년에 궁궐 건물들의 이름을 바꿀 때 “조계청”이라 하던 것을 선정전이라 하였다. 선정전도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이 광해군 때 재건되고 인조반정 때 다시 화재를 당하여 인조 25년(1647)에 중건되었다. 이 때에는 광해군이 창건한 인경궁의 전각을 철거하여 그 재목을 이용함으로써 700여 칸의 전각 중건을 5개월만인 짧은 기간에 완공한다. 그 뒤의 선정전 변천에 관해서는 현종 15년(1674) 7월에 건물이 손상된 것을 고치라는 분부가 있었으나 봄부터 앓아 온 질병으로 8월 현종이 승하하였으므로 시행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리고는 선정전의 수리에 관한 기록이 없으므로 이 건물은 인조 때에 중건된 건물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하겠다.

희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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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전이 왕과 신하들을 공식적으로 만나 이런 저런 일을 처리하는 집무실이라면 희정당은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장소이다. 1917년 11 월 10일 오후 다섯시 순종이 기거하던 대조전에서 불이 났다. 이 불은 그 주변의 건물로 크게 번져 대조전 희정당을 비롯하여 내전 일대의 주요 건물로 번져나갔다. 불이 난지 4일뒤 화재 처리 방도를 마련했는데, 우선 낙선재를 순종의 처소로 삼고 불타 없어진 내전 건물들은 다시 짓기로 하였다. 다시 짓기는 짓되 “조선식을 위주로 하고 나머지는 양식을 참고로 하기로” 정하였다.

또 얼마 뒤 총독부와의 협의 하에 경복궁의 내전인 교태전과 강녕전을 비롯하여, 그 주변 건물들 여남은 채와 그 부속건물의 구재를 창덕궁 전각을 중건하는 데 이건하기로 결정했다. 중건공사는 일본인이 감독을 맡아 진행했다. 그 중건공사는 원래 1년 안에 마칠 계획이었으나 중간에 고종이 승하하고 3.1운동이 크게 일어나는 등 이런 저런 사정으로 3년이 걸려 1920년 10월에 완공되었다. 이렇게 총독부와 일본인이 맡아서 공사를 추진하고 더구나 “조선식을 위주로 하고 그 나머지는 양식을 참고하기로” 하면서 당연히 왜곡과 변질이 따르게 되었다. 창덕궁은 산자락을 끼고 있어 상대적으로 건물들의 크기가 경복궁에 비해 작다. 그런데도 좁은 희정당 터에 덩치가 큰 경복궁의 강녕전 건물을 억지로 들어앉혔다.

그러면서 모양도 바꿔 강녕전은 원래 지붕에 용마루가 없었으나 옮기면서 시멘트로 바른 용마루가 생겼다. 중앙의 세칸은 툇칸이라 하여 마루가 밖으로 드러나 있던 것이 없어져 버렸고, 건물 앞에도 월대가 있어야 제격일텐데 가파른 계단만이 달랑 달려있다. 벽이 없는 앞마당에는 웬 굴뚝까지 서 있다. 희정당으로 들어가는 앞 건물에는 난데없이 일본식 현관까지 두 개가 튀어나와 있다. 자세히 보면 현관의 창방 부분에는 오얏꽃 무늬가 여기저기 달려있기도 하다. 동궐도의 아담한 건물과 비교해보면 너무나 이질적인 모습이다. 지금의 희정당 안을 들여다보면 거실로 사용되는 부분이 정면 9칸 측면 3칸이다. 중앙부의 3칸은 전체를 응접실로 꾸미고 서쪽의 3칸은 회의실이 되고 동쪽의 3칸은 여러칸으로 막아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1920년대에 중건하면서 내부는 서양풍의 가구와 치장이 더해져 커튼박스와 전등이 설치되고 쪽널마루 위에 붉은 카펫으로 설치한 모습이 이색적이다. 특히 응접실에는 해강 김규진이 그린 “총석정절경도”와 “금강산 만물초승경도”가 각각 동쪽과 서쪽 벽에 걸려있다. 

대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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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정당 뒤편으로 돌아가면 대조전이 있다. 대조전은 왕비의 시어소, 곧 왕비가 기거하면서 공적인 활동을 하는 집이다. 왕비는 내명부라는 체제로 편제되어 있던 후궁과 궁녀 등 궁궐의 여자들을 관리하는 공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던 공인이다. 그러한 왕비가 활동하는 공적인 건물이 대조전이다. 대조전은 창덕궁에서 가장 내밀한 곳  구중 궁궐 깊은 곳 중궁전이다. 지금의 대조전도 희정당과 함께 1917년에 불이 나서 모두 없어진 뒤 경복궁의 왕비 처소인 교태전을 헐어서 그 자재로 새로이 지은 것이다.
희정당에서 대조전을 잇는 육교식 복도나 정문인 선평문으로 들어가는 가파른 계단에서부터 그 주위의 부속건물들 모두 본래 제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앞마당에는 영락없이 잔디가 깔려있고 소나무가 서너 그루 서 있다. 정면 9칸 측명 5칸 해서 45칸이나 되는 큰집이 좌우에 부속건물과 행각을 거느리고 버티고 있는 모습은 너무 크고 위압적이다.

중앙의 세칸은 툇마루로 되어 있는데 그 앞에는 넓은 월대가 있다. 월대는 왕비를 위한 연회 등이 이루어지던 곳이다. 월대를 지나 툇마루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넓은 대청마루이고 그 마루 좌우로는 9칸짜리 온돌방이다. 그 가운데 동쪽 온돌방이 주로 왕과 왕비가 동침하는 방이다. 지금은 형태가 변해 있지만 그 방은 내부가 다시 우물 정자로 칸막이가 되어 아홉 개의 작은 방으로 나뉘는데 왕과 왕비는 가운데 방을 쓰고 그 주위의 여덟개 방에는 궁녀들이 두명씩 들어가 시중을 들었다고 한다. 대청은 서양식의 쪽널마루로 깔고 응접실로 꾸며 중국풍의 의자를 갖추고 왕비의 침실에는 침대가 놓인다. 창호의 종류도 다양하여 대청 전후면은 세살분합문을 설치하고 외부로는 머름중방 위에 亞자 분합문과 고창을 두었고 대청과 방 사이에는 8짝의 불발기문을 설치하고 그 윗벽인 대청 동쪽 벽에는 “봉황도”로 서쪽 벽에는 “군학도”로 장식하였다.

 

대조전은 여느 건물들과는 달리 용마루가 없다. 용마루가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경복궁의 교태전에서 설명한 바 있으나, 다시 간단히 설명을 한다. 왕은 용으로 상징되는데 용이 깃드는 집에 또 용(용마루)이 있으면 두 용이 충돌함으로 용마루를 만들지 않았다 한다. 이를 부연하자면, 대조전의 대조란 크게 만든다 혹은 무언가 큰 것을 만든다는 것일텐테 이때 큰 것이란 다시 말하자면 왕자, 즉 다음 대의 왕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곧 왕과 왕비가 동침하여 아기를 생산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집은 그러한 천지음양의 조화, 남녀가 화합을 이루는 곳이므로 이를 가로막는 듯한 용마루를 설치하지 않은 듯하다. 비단 이 대조전만이 아니라 경복궁의 교태전과 강녕전 창경궁의 통명전에는 용마루가 없다. 용마루가 없는 대조전은 1926년 순종이 이곳에서 승하하신 뒤에는 큰 무엇을 만드는 곳이 아니라 주인 없는 삭막함만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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