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과 종묘 알아보기 [경운궁] -2-

궁궐길라잡이
2017-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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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어당은 임진왜란 후 선조 임금이 거처하셨던 건물로써 한자를 풀이하더라도 옛날 임금님이 머물렀던 집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선조 임금이 이곳에서 16년간이나 머무시다가 1608년 승하하신 곳이다. 그 후 순종이 황태자 시절에 머물기도 하셨다.
석어당은 경운궁 내에서 유일한 2층 건물이며, 단청이 입혀져 있지 않아 눈에 띤다. 단청이 입혀지지 않은 것에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선조임금이 임진왜란 이후의 어려운 시기를 보내셨기 때문에 그 어려웠던 때를 기억하기 위해서 칠해지지 않았다고도 하고, 또 유교 사회의 검약을 강조하는 분위기 때문에 단청이 칠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현재의 모습은 1904년 화재 이후 중건된 것이며, 아래층은 정면 8 칸, 측면 3칸이고 위층은 정면 6칸, 측면 1칸인 팔작 지붕의 건물이다.
<석어당 내부>seogeodang3_3.jpg

덕홍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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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가 외국사신이나 고위 관료들을 접견하던 곳이다. 외국세력을 통해 일본의 그늘에서 벗어나 보고자 하는 목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나 싶다.
덕홍전은 전기시설을 갖추고 있는데, 참고로 우리 나라 최초의 전등은 1887년 경복궁 내 건청궁에 설치된 바 있었다. 일상생활을 하는 곳은 아니므로 바닥을 온돌이 아닌 마루로 되어 있고, 특이하게 정면3칸, 측면 4칸으로서 측면이 정면보다 더 크다는 특징을 지닌다.

안에는 대한제국의 문장인 오얏꽃과 꽃 양 옆으로 봉황의 머리가 있다. 여기서 오얏꽃을 1910년 한일합병으로 대한제국이 망한 후에, 한 국가의 문장으로서 자격이 아닌 일본 천황 밑의 일개 제후국 귀족가문의 문장을 뜻하는 망한 나라 왕실의 상징으로 격하, 왜곡되었다.
<덕홍전 내부>deokhong_1.jpg

함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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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홍전과 이웃하고 있는 이 전각은 침전의 기능을 하던 곳이었다. 지금의 전각은 1904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후 다시 중건한 것이다. 함녕전 앞에는 행랑이 둘러서고 있고 내시나 궁녀가 기거하면서 시중을 들었음을 보여준다. 훼손되기 이전에는 이러한 행랑이 밖에 하나 더 있었는데, 외행랑이라 불렀고 이쪽에 함녕전으로 들어가는 광명문이 있었다. 현재는 미술관 가는 쪽에 자격루, 흥천사종, 신기 전기화차 등을 넣어둔 전시관으로 쓰이고 있어서 현재 문 노릇을 하지 못하고 있다.
함녕전의 행랑담을 보면 덕홍전과의 사이지점에 끝이 좀 올라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이곳에 담이 있어 함녕전과 덕홍전의 공간이 분리되어 있었다는 증거이다. 함녕전 측면을 보면 지붕이 좌우대칭이 아니고 왼쪽의 2칸은 아궁이가 없는 것이 보이는데, 이것은 나중에 2칸을 다시 지었기 때문이다. 오른쪽의 아궁이가 1904년 화재의 진원지로서 온돌 수리 후 시험 삼아 불을 땐 것이 화근이었다고 한다. 단 시간 내에 불이 궁궐 전체에 옮겨 붙은 것이나 밤 10시나 된 늦은 시간에 시험 삼아 불을 땐 점 등이 의구심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이곳에서 승하하셨는데, 갑작스런 죽음이었기에 많은 의구심을 품게 했고 이는 장구의 운반일 이었던 3월 1일, 만세운동이 일어나는 계기가 된다.
<함녕전 내부>ham_1.jpg

정관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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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풍이 느껴지기도 하는 서양식 건물로 설계는 러시아인이 공사는 중국인이 했다. 여기서 고종은 연회를 열기도 하고 가배다(嘉排茶,커피)를 마시면서 휴식을 취하기도 하였다.
고종의 침전인 함녕전 뒤편 동산에 위치하여 내전 후원의 정자 기능을 대신한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어딘가 모르게 우리나라 건물이 아닌 느낌을 받기도 하지만 난간과 지붕 아래쪽을 장식한 문양(박쥐, 소나무, 사슴등)이나 기둥(천원지방)을 보면 기본적인 개념은 우리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기둥과 기둥 사이를 보면 아직도 문을 냈던 자국과 주방으로 연결되는 작은 창을 볼 수 있다. 이것을 통해서 한때 커피숍으로 이용되었던 정관헌의 모습도 그릴 수 있다.
<정관헌 내부>jeonggwhan_1.jpg

석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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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전은 1900년 착공하여 1910년 완공된 지상 3층 연건평 1,247평 의 석조 건물이다. 당시 대한제국의 재정고문 이었던 영국인 브라운의 발의에 의하여 영국인 기사 하아딩에게 의뢰하여 설계되었다.
1904년 11월 브라운은 일본인 재정고문 메가다(目賀田)와 교체되며 자연스레 건축 주도권도 넘어가서 결국 그에 의해 완공되었다. 건물의 구조는 2층에 접견실, 3층에 황제의 침실, 1층(반지하)에 시종들의 대기장소를 두었다.

건축양식은 희랍 로마양식의 복고로 구미(歐美)에 유행하였던 콜로니얼(Colonial) 양식의 일종으로  신고전주의를 따른 것이다. 중요한 역사적 사건은 1946년 1월 16일 일제로부터 해방된 한반도의 장래를 논의하기 위해 이곳에서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로 이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따라 신탁통치와 임시정부수립 등을 논의하기 위한 것으로 그 첫 예비회담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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