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과 종묘 알아보기 [창덕궁] -1-

궁궐길라잡이
2017-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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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의 역사cdmain.jpg
태조 3년 한양 천도가 있은 후, 정종은 그 원년 3월 개경으로 환도하였고 다시 태종이 즉위하여 재차 서울로 천도하게 되었다. 창덕궁은 태종이 재천도하면서 창건된 궁이다. 태종이 말하되 “개성은 왕씨의 구도이므로 거처할 수 없는 곳인데 지금 그곳에 머물러 있는 것은 태조시조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다. 한성은 태조상왕의 창건지이며 종묘와 사직이 있다. 이곳에 거처하지 않는 것은 뜻을 잇는 바 효(孝)가 못되니 근년 겨울에 내가 옮아가 거처할 것이니 궁실을 짓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태종 4년에 시작한 창덕궁 공사를 만 1년만에 완공하고 이름을 “창덕궁”이라 하였다. 태종 11년에 이르러서는 진선문 석교(금천교)를 시축하고 태종 12년에는 돈화문을 건립함으로써, 창덕궁은 완전한 궁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그로부터 임진왜란까지 약 180여년간은 별로 큰 재난이나 큰 건물의 신축은 없었고 다만 인정전 후원 담장 증축과 수문당과 대조전의 중수 등이 있었으며 임진왜란 후 폐허로 있다가 광해군 때 재건을 시작하여 광해군 5년경 완전히 재건하였다. 그후 인조반정 때 큰 화재가 발생하여 인정전만 남는 수난을 당했으나 그후 다시 여러 전각들을 재건하여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때 새로 지어진 건물은 대조전, 선정전, 희정당, 정묵당, 집상당, 보경당, 옥화당, 태와당 등이다.

1863년 철종이 대조전에서 승하함에 따라 고종은 인정전에서 즉위하였다. 그후 대원군에 의해 왕이 경복궁으로 이어한 뒤로는 창덕궁에 별로 수리나 영건이 없다가 고종 10년 겨울 경복궁 자경전의 화재로 인해 왕은 다시 창덕궁으로 어어하게 되었으며, 그후 10년간 이궁에 거처하면서 고종13~14년에 걸쳐 일대 수리를 하여 궁궐의 면모를 되찾았다. 그러나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치르고 난 왕은 22년 봄 다시 경복궁으로 이어하였다. 그후 창덕궁은 왕이 잠시 들르는 일이 있었을 뿐 이렇다할 변천 없이 20여년을 지내다가 융희 원년 10월에 다시 순종 이하 왕실 일행을 맞이하여 황궁으로서의 출발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일제의 침략 세력이 궁중을 장악하고 있었을 때이므로 황궁으로서의 면모를 갖출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광무 11년 8월 경운궁에서 즉위한 순종은 그해 10월에 창덕궁의 수리를 명하고 11월에 창덕궁으로 이어하였지만 궁중은 일제 침략자들이 무상 출입하는 장소가 되었다. 인정전, 의정당, 주합루 등 건물은 수시로 이토 히로부미 이하 저들의 접견 향응에 제공되고 후원에는 학생들의 운동회가 열리기도 하니 전일 궁중의 위엄은 다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융희 4년 8월에는 매국노 이완용 등이 총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지시에 따라 우리나라를 일본에 합병하기로 정한 다음 이 창덕궁에서 마지막 어전 회의를 열고 황제를 핍박하여 한국의 통치권을 일본 황제에게 양여한다는 조서에 옥새를 빼앗아 누르니 오백년 왕조의 창덕궁은 순종이 “창덕궁 전하"라는 칭호로 여생을 보내는 비운의 궁이 되고 말았다.

돈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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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화문
이 창건된 것은 태종 12년(1412)이며, 2층 문루에는 큰 종을 걸고 시각을 알리거나 비상시 위급을 알리는 용도로 썼다고 전한다. 그 뒤 임진왜란 때에 불탄 것을 선조 40년(1607)에 중건하여 광해군 원년에 완공되고 이때의 건물 모습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돈화문은 현존하는 궁궐의 대문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할 수 있다(보물383호).

정면 5칸에 측면 2칸의 2층 우진각 지붕의 다포양식이다. 궁궐의 대문 가운데 정면이 5칸인 것은 돈화문이 유일한 것이나 좌우쪽 협칸은 벽으로 막았으므로 실질적으로는 3칸 대문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황제가 아닌 군주는 대문을 3칸으로 해야 하는 중국과의 관계로 이해될 수 있다. 곧 3칸 대문으로 만들어 중국의 사신을 의식하면서도 외관은 크고 장중하게 만들려는 의도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회화나무, 느티나무


돈화문을 들어서서 왼편으로 안내판 뒷편 일대에 꽤 나이가 들어 보이는 나무들이 서너그루 있다. 가시가 없고 크기도 큰 이 나무들은 괴목, 회화나무 또는 홰나무라 한다.


돈화문을 지나면, 느티나무가 자리잡고 있다. 느티나무는 특히 우리나라, 우리민족에게 여러 가지 의미를 던져주고 있는 나무이다. 우리나라의 마을에는 대개 큰 정자나무가 있었으니 이때 가장 뛰어난 기능을 발휘한 것이 느티나무였다. 느티나무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군림하기도 했고 동네 사람들의 휴식처로 때로는 서당의 선생이 강학하는 민족의 애환이 모인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입구에서 만난 이 나무가 다른 어떤 나무보다 정답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이다.


느티나무와 회화나무는 한자로 쓰면 모두 “괴(槐)”가 된다. 괴는 주나라 이래 궁내에 심는 나무의 대표적 수종이다. 주례에 보면 주나라 시대에는 궁의 고문(궁성의 가장 바깥누문을 말함)과 응문(궁중의 정문)사이에 느티나무와 회화나무를 심어서 이 나무 밑에 삼공(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나란히 마주 보고 앉아 오는 이를 맞이하였다고 했다. 따라서 우리나라도 이 제도에 따라 궁궐 입구에 괴수를 심었다.


원래 경복궁의 광화문과 근정문 사이에도 느티나무와 회화나무가 심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건물의 건설 당시 사라져 버렸다. 물론 경희궁터와 경운궁에도 느티나무가 있었다. 현재 신문로 시립박물관 동쪽 주변이나 정동일대에 군데 군데 보이는 거목들이 바로 궁궐에 속해 있던 느티나무들이다. 궁안에 심는 나무 하나에도 돌 하나에도 의미와 철학을 담는 우리 조상들의 대단함에 또한번 놀란다. 창덕궁 안 다른 곳에서도 가끔 눈에 띄는데, 나무에도 뜻을 심은 그 뜻을 헤아릴 수 있으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금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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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화문을 들어서면 길은 메마른 느낌의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다. 원래는 박석이 깔려있던 길이라 한다. 그리고 가운데 부분은 어도로 그 길은 돈화문에서 북쪽으로 진행되다가 금호문이 있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꺾여 창덕궁 내부로 향하게 되어있다. 흘러내리는 산자락에 맞춰 자연스럽게 건물을 배치하다 보니 그렇게 축이 꺾이게 된 것이다. 그렇게 꺾인 길앞에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개울이 가로질러 흐르고 있다. 그 개울을 금천이라 하는데 궁궐의 안팎을 구별하는 의미와 배산임수의 뜻을 살리기 위한 명당수의 의미가 있다. 옛날에는 당연히 맑은 물이 흘렀을 금천에 지금은 물이 흐르지 않는다.
금천과 어도가 만나는 지점에는 다리가 놓인다. 이 다리를 일반적으로 “금천교”라 하는데 이것은 태종 11년(1411) 창덕궁을 처음 지을 당시의 것으로 창덕궁과 다른 궁궐을 통틀어 가장 나이가 많은 건축물이다. 다른 것들은 임진왜란이나 혹은 일제시대 때 불타고 헐렸으나 금천교는 60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아직 끄떡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금천교는 돌다리치고는 상당히 넓은 다리다. 전체가 세 구획으로 이루어진 삼도인데, 가운데의 어도가 상당히 넓고 좌우에 돌난간을 세웠는데 난간 네 귀퉁이에 동물 석상이 감시를 하고 있다. 네마리 짐승이 제각각 다른 몸짓에 다른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이 재미있다. 다리 밑의 물길에는 홍예를 틀었는데 두 홍예 사이 역삼각형이 이루어진 부분에는 도깨비 얼굴이 돋을 새김으로 새겨져 있고 그 앞뒤 도깨비 얼굴 앞에는 짐승들이 앉아 있다. 남쪽에 있는 것은 얼핏 보면 해치같기도 하지만 자세히 보면 몸에 털이 아니라 비늘이 덮여있고, 뿔도 두 갈래로 갈라져 있는 것을 보면 해태는 아니다. 혹 백택(白澤)이라고 하는 또 다른 상상의 짐승이 아닐까 추측된다. 북쪽에 있는 것은 몸통은 거북이 같으나 얼굴을 보면 사람 얼굴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것이 무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거북인 아니다. 거북이 몸통에 용의 얼굴을 하고 북쪽을 지키는 상서로운 짐승을 현무라 하니 이것도 현무라고 해야 할까. 현무는 청룡, 백호, 주작과 함께 넷이 짝을 이루어야 하나 여기는 둘뿐이니 현무라고 하기도 어렵다.

진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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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교를 건너면 진선문이 있다. 일제시기 언젠가 없어진 것을 지금 완공해 제자리를 잡은 듯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금천교와 진선문은 엇갈려 있다. 옛사진을 보면 금천교에서 눈을 감고 곧장 걸으면 바로 진선문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축이 똑바르지 않아 보인다.


진선문에는 억울한 일이 있는 백성이 와서 치면 왕이 듣고 억울한 사정을 해결해주마고 하는 큰북이 달려 있었는데, 태종대에 처음 설치하였다가 중간에 유명무실해진 것을 영조대에 다시 설치하였다 한다. 이 북을 “신문고" 혹은 “등문고"라고 하였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이 궁궐 문으로 들어가서 북을 쳤다고는 쉽게 생각할 수 없다. 이 모든 것이 상징적인 의미일 것이다.

선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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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선문 북쪽으로 가면 벽돌건물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전통 건축 기법이 아니다. 이곳은 일제시대 때 일제가 창고나 또는 검도장으로 쓰던 곳이라 한다. 그 건물 북쪽에는 제대로 된 우리 건물이 있다. 주변의 부속건물들은 모두 잃어버린채 홀로 남아있기는 하지만 어딘지 범접할 수 없는 격조가 있다. 안내판에는 구선원전으로 되어 있다. “종묘"가 역대 왕과 왕비들의 위패를 모셔놓고 일년에 다섯 차례 제사를 모시는 국가의 사당이라면 선원전은 태조와 현왕의 4대조의 초상화-어진을 모셔놓고 초하루, 보름, 생신이나 기일 등 수시 로 왕이 직접 가거나 혹은 대리인을 보내어 차례를 모시는 왕실의 사당이다.
종묘가 국가의 정신적 구심점이자 서울의 대표적 상징으로 높이 모심을 받았다면 선원전은 왕실의 정신적 지주로서 궁궐에서 가장 신성한 곳으로 인정받았다. 왕이 궁궐을 옮겨갈 떄는 반드시 선원전의 어진부터 챙겨 받들어 모시고 갔다.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고 궁궐을 잡아먹은 일제로서는 그런 선원전을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1927년 총독부에서는 창덕궁 후원 서북편에 있던 대보단 자리에 새로 선원전을 짓고 어진들을 옮겼다. 이른바 신선원전이요 원래의 선원전은 빈 건물만 남아 구 선원전으로 불리게 되었다. 지금도 그 구선원전은 저렇게 신주없는 사당의 썰렁함에 젖어있다.


현재는 선원전만이 남아 있으나 건물의 네모퉁이에는 “진설청”과 “내재당”의 부속채가 있었고 동남쪽에는 국왕의 재실인 10칸의 양지당이 있었다. 남쪽 행각에는 연경문이 있고 서쪽에는 승안문과 지난날의 일을 되새긴다는 의미의 건물명인 억석루가 연속되어 있다. 행각 남쪽엔 영의당 선원전 담장 밖 북서쪽에는 숙경재가 있고 동쪽문은 만안문 서쪽문은 만녕문 북쪽에는 경숙문과 영휘문이라 하여 조상을 공경함으로써 영원히 안녕을 누리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건물은 정면 9칸 측면 4칸의 이익공 양식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세벌대의 장대석 기단위에 네모 기둥을 빠짐없이 세우고 내부는 전체를 통칸으로 하여 우물마루로 깔았다. 기단의 앞면과 뒷면엔 3, 5, 7칸 부분에 단순한 장대석으로 계단을 설치하였다. 실제의 출입구는 정면 가운데 1개소임에도 불구하고 앞뒷면으로 6개소에 설치한 계단은 조상의 혼백과 교통하려는 의미가 내포된 것이다.

궐내각사


동궐도에서 보듯이 그 당시에는 선원전 앞 넓은 마당에 이십여 채의 건물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한다. 선원전 바로 앞에는 제물을 준비하여 놓은 진설청과 제관이 머무는 재실이 있었고 그 동쪽으로 와서 선원전에 갈 때 머무는 “양지당”이라는 건물과 그 부속 건물들이 있었다. 그 남쪽에는 내의원, 내의원 남쪽으로 홍문관이, 홍문관 동편에는 정청이 있었다. 약방으로 불리기도 하는 “내의원”은 왕과 왕실의 진료를 담당하는 기구이므로 당연히 궁궐 안에 있어야 했다. “홍문관”은 궁궐에 보관하고 있는 서적을 관리하면서 학문과 글짓는 일을 연마하여 왕에게 자문을 하는 일을 담당하는 관서였으며, 정청이란 인사업무를 처리하던 곳이다. 홍문관원들은 자동적으로 왕과 함께 경전과 역사책을 읽고 토론하는 경연에 참여하였으며, 또 왕의 명의로 글을 짓는 지제교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인사를 담당하던 관서는 이조와 병조로서 역시 본청은 궁궐 밖에 있었지만 인사업무는 담당관원들이 궁궐안 정청에 들어와 처리하였던 것이다. 궁극적으로 인사권은 왕에게 있었고 따라서 왕의 의사를 묻고 이를 반영하는 인사업무를 원활히 처리하기 위해서는 정청을 왕이 계신 곳 가까이에 마련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왕을 가까이서 모실 필요때문에 궁궐 안에 들어와 활동하는 관원들의 관서를 통틀어 “궐내각사”라 한다. 일제는 다른 궁궐과 마찬가지로 창덕궁 역시 철저히 파괴하였다. 신선원전은 창덕궁의 내의원과 홍문관등을 흔적도 없이 뭉개버리고 들어선 건물이다.

<우리궁궐이야기, 청년사, 홍순민 지음>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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