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의 역사 | 경복궁은 1392년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이성계에 의해 세워진(만들어진) 첫 궁궐이다. 조선왕조의 법궁(法宮)으로서 개국공신 정도전으로 하여금 <시경(詩經)> 주아편의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 만년에 큰 복(景福)을 누리리라’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궁궐의 이름을 경복(景福)이라 정하게 했다고 한다. 한때, 이방원 (태조의 5번째 아들 - 후에 태종)주도의 왕자의 난으로 조선 2대왕 정종(태조 2째 아들) 등극 및 정종의 개경환도로 잠시 경복궁이 제 기능을 하지 못했으나, 3대 태종의 한양 재환도와 4대 세종의 즉위를 기점으로 법궁으로 써 제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그런데, 3대 임금인 태종의 한양환도 때에 또 다른 궁궐인 창덕궁이 제2의 궁궐로 창건되어 궁궐이 2개로 늘어났으며, 그 후 9대 성종 조에 이르러 창경궁이 중건되니 궁궐의 수가 3개로 늘어나게 된다.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궁궐의 수가 늘어났으나 그 중에서도 경복궁은 조선왕조의 명실상부한 「제1의 궁궐」로 통치자의 권위의 상징이자 국권의 중심부로 역사의 표면에 떠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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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으로 경복궁과 창덕궁 대부분의 건물들이 소실되었고, 그 후 창덕궁, 창경궁은 복구되나 경복궁만은 273년간 재건되지 못한 채 빈 터로만 남아있다가 1865년(고종2)에 흥선대원군 주도로 중건에 착수, 1868년(고종5)에 다시 복원됨으로써 왕조의 법궁으로 써 면모를 되찾게 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비극의 시작을 알리는 1895년 8월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왕비살해)이 일어나고 이듬해인 1896년(고종33)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이동, 1897년 경운궁(덕수궁) 에 기거하시니 주인 없는 집은 그 의미를 잃듯이 경복궁 역시 빛을 잃게 된다. 그 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궁궐은 크게 훼손되어 고종 중건 당시의 10%정도의 전각만이 남게 되는 비운을 겪으며 공원화 되는 위기를 극복하고 현재 장기복원 계획에 의해 본래 모습을 되찾는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다.경복궁은 사적117호로 종로구 세종로 1-56 번지에 위치, 규모는 연 면적 약 127,000평 (416,990㎡)에 이르며, 궁궐 내에 근정전, 경회루의 국보와 자경전, 아미산 굴뚝 등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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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 경복궁의 정문(正門)이자, 국권(國權)이 드나드는 왕권의 상징성 을 갖는 문이기도 하다. 창건초기에는 오문(午門) 이라 칭하다가 세종 조에 이르러 동서남북 4방위의 문들이 각각 이름이 붙여 져 오문(남문을 뜻함)은 광화문으로 명명되는데 의미는『빛이 나라밖 사방을 덮고 교화가 만방에 미친다』(光被四表化及萬方)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역사의 부침 속에서 이 광화문도 수난을 많이 당했는데 일제 강점기에는 경복궁 내 「조선총독부」신축으로 원래의 위치에서 철거당하여 건춘문(동쪽문) 북쪽으로 이전 되었다가 1968년에 현 위치로 자리잡게 되는데 본 위치에서 약15m 가량 뒤로 물러나게 되고 문루(문의 상부)는 6.25동란에 소실되는 아픔도 간직하고 있으며, 3개의 홍예(아치)가 아름다움과 권위를 겸비한 조선궁궐의 정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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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례문
| 이 문은 본디 홍례문이라 했는데 고종 중건때 흥례문으로 바뀌었 고 궁궐 내로 들어가는 두 번째 문이다.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의 좌우공간은 궁궐을 지키는 군사들을 위 한 관청 및 부속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기타 궁궐 내 작은 행사나 큰 행사의 준비가 이루어졌던 공간이었다고 한다. 과거 일제에 의한 조선역사 말살과 왜곡의 희생지는 1차로 이 지역에서 단행되어 이곳에 「조선 총독부」건물이 지어졌다. 그런 연후 궁궐의 중심부를 시야에서 차단하여 역사의 관념을 지 워버리려 했으나 다행스럽게도 오늘날 그 옛 모습으로 근간에 복원되어 중심축을 이루니 궁궐의 본래 모습이 조금씩 되살아 나 고 있다. 간혹, 역사의식 없이 구 조선총독부 건물에 대한 미련을 가진 분이 계시다면 궁궐은 ‘건축’만을 감상하는 곳이기보다 "역사를 음미하는" 장소임을 생각해주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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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제교
| 흥례문을 들어서 근정전으로 나아가기 전 또 하나의 통과례를 거치는 곳. 일반사회의 공간에서 지엄하신 공간으로의 이동은 무언가 마음속으로 생각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곳은 서에서 동으로 금천(禁川)이 흐르고 다리가 놓이는데 바로 영제교라 한다. 금천의 의미는 잡스러운 것이 함부로 근접하지 말라는 것으로 해석되며 이는 마치 사찰을 방문할 때 중생의 세계와 부처의 세계를 경계짓는 상징물과 같다. 금천에 흐르는 물은 명당수라 칭하며 행여 사악한 것이 물줄기를 타고 접근할 새라 파수꾼의 역할을 하는 서수가 영제교를 중심으 로 네 마리가 버티고 있다. 또한 영제교 위에도 네 마리의 서수가 있어 다리를 건너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나 언행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 여러분도 이러한 상징물들의 의미를 헤아려보면서 조선조 궁궐을 드나들던 관리들처럼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영제교를 건너 보신다면... |
근정문, 근정전 | 궁궐(宮闕)은 나라를 다스리는 왕과 그 가족들이 거처하던 곳이며 그 외 나라를 다스리는 곳, 즉 통치를 하는 공적인 공간이다. 근정전은 이 공적인 공간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 는 국가적 큰 행사로, 조하(朝賀)라고 해서 군신간에 연초 하례가 있고 조회(朝會), 즉위식(卽位式), 책봉례(冊封禮), 고급관리 임용식, 사신영접(중국) 등 국가의 대사가 행하여졌다. 중심건물인 근정전은 궁궐 내 가장 높은 건물로 상, 하 월대와 돌 난간을 두루고 난간의 모퉁이에는 12지신상 및 방위신상의 서수를 조각하여 위용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표현해 놓았다. 그 외에 답도, 드므, 정, 품계석, 박석, 근정전내 어좌, 보개, 일월오봉병 등 보고 느끼고 생각할 것이 많은 조선조의 조정이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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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전 | 근정전이 큰 행사의 공간이라면 사정전 권역은 구체적 통치행위 가이루어진 실질적 업무공간이다. 이곳에는 두 개의 부속건물도 자리하는데 동쪽에는 만춘전, 서쪽에는 천추전이 있으며 두 부속건물은 아궁이가 있어 난방이 가능하나 중심건물 사정전은 마루로 되어 있어 계절에 따라 용도를 달리하였나 보다. 사정전은 생각 思, 정치할 政, 곧 만백성을 생각해 가면서 어진 정치를 행하여 달라는 염원을 담아내고 있다. 조선의 통치이념인 유교적 도덕률을 엿볼 수 있는데 근정전도 근 면한 마음으로 정치를 행해 달라는 의미와 연관된다. 조선의 군주는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폭군이 아니라 따뜻한 어버이이기를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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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전, 궐내각사 | 현재 수정전은 고종 때 중수한 것으로 고종의 집무실(편전), 개혁 기구인 군국기무처, 내각청사, 일제의 물산공진회 때는 전시관으로 1960년대에는 민속관, 전시관으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조선 전기로 올라가면 역사적 유래가 의미심장한 곳이다. 세종연간에 집현전이있던 곳. 한글창제와 깊은 연관이 있는 곳이며 당시 엘리트 집단의 근무처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이 일대를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궁궐 내 관청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를 궐내각사라고 한다. 지금은 그 건물들의 자취를 느낄 수 없으므로 궁궐기능이 왜곡되 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데 현재 잔디와 나무로 단장되어 있는 공간이 과거엔 관청으로 꽉 들어차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궁궐은 잔디와 나무가 아무 곳에나 있지 않았으며, 공원 놀이마당 정원 같은 곳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유념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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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회루 | 경복궁을 찾는 모든 관람객이 최고로 여기는 장소 중 하나이다. 웅장하고, 늠름한 자태의 경회루를 바라보면 조선건축의 아름다 움에 반하고 만다. 현재도 그러하거니와 과거에는 더욱더 경외의 대상이었다. 바로 앞 궐내각사에 근무하던 관리들도 높은 담장으 로 막혀 함부로 접근할 수 없었던 왕실전용 연회의 공간이자 사신 접대의 장소인 경회루. 1, 2층 기둥의 재료와 그 모양새, 천원지방(天圓地方)과 주역원리(周易原理)의 동양사상을 표현한 건축술, 또 인공섬 세 개를 만들어 봉래, 방장, 영주라는 전설의 삼신산을 상징화한 의미있는 구도, 동양 제일의 누마루 집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건축미를 자랑한다. 또한, 실용성을 도입한 경회루 3개 다리의 배치, 지붕 잡상의 궁궐 내 최다 배열 등 어느 하나 소홀히 보아 넘길 수 없는 곳이 이곳이다. <국보 제224호로 지정> |
조선왕조의 법궁(法宮)으로서 개국공신 정도전으로 하여금 <시경(詩經)> 주아편의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 만년에 큰 복(景福)을 누리리라’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궁궐의 이름을 경복(景福)이라 정하게 했다고 한다.
한때, 이방원 (태조의 5번째 아들 - 후에 태종)주도의 왕자의 난으로 조선 2대왕 정종(태조 2째 아들) 등극 및 정종의 개경환도로 잠시 경복궁이 제 기능을 하지 못했으나, 3대 태종의 한양 재환도와 4대 세종의 즉위를 기점으로 법궁으로 써 제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그런데, 3대 임금인 태종의 한양환도 때에 또 다른 궁궐인 창덕궁이 제2의 궁궐로 창건되어 궁궐이 2개로 늘어났으며, 그 후 9대 성종 조에 이르러 창경궁이 중건되니 궁궐의 수가 3개로 늘어나게 된다.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궁궐의 수가 늘어났으나 그 중에서도 경복궁은 조선왕조의 명실상부한 「제1의 궁궐」로 통치자의 권위의 상징이자 국권의 중심부로 역사의 표면에 떠오르게 된다.
집은 그 의미를 잃듯이 경복궁 역시 빛을 잃게 된다. 그 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궁궐은 크게 훼손되어 고종
중건 당시의 10%정도의 전각만이 남게 되는 비운을 겪으며 공원화 되는 위기를 극복하고 현재 장기복원 계획에
의해 본래 모습을 되찾는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다.경복궁은 사적117호로 종로구 세종로 1-56 번지에 위치, 규모는 연 면적 약 127,000평 (416,990㎡)에 이르며, 궁궐 내에 근정전, 경회루의 국보와 자경전, 아미산 굴뚝 등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광화문
경복궁의 정문(正門)이자, 국권(國權)이 드나드는 왕권의 상징성
을 갖는 문이기도 하다. 창건초기에는 오문(午門) 이라 칭하다가 세종 조에 이르러 동서남북 4방위의 문들이 각각 이름이 붙여
져 오문(남문을 뜻함)은 광화문으로 명명되는데 의미는『빛이 나라밖 사방을 덮고 교화가 만방에 미친다』(光被四表化及萬方)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역사의 부침 속에서 이 광화문도 수난을 많이 당했는데 일제
강점기에는 경복궁 내 「조선총독부」신축으로 원래의 위치에서
철거당하여 건춘문(동쪽문) 북쪽으로 이전 되었다가 1968년에 현
위치로 자리잡게 되는데 본 위치에서 약15m 가량 뒤로 물러나게
되고 문루(문의 상부)는 6.25동란에 소실되는 아픔도 간직하고 있으며, 3개의 홍예(아치)가 아름다움과 권위를 겸비한 조선궁궐의 정문이다.
흥례문
이 문은 본디 홍례문이라 했는데 고종 중건때 흥례문으로 바뀌었
고 궁궐 내로 들어가는 두 번째 문이다.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의 좌우공간은 궁궐을 지키는 군사들을 위
한 관청 및 부속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기타 궁궐 내 작은 행사나 큰 행사의 준비가 이루어졌던 공간이었다고 한다.
과거 일제에 의한 조선역사 말살과 왜곡의 희생지는 1차로 이
지역에서 단행되어 이곳에 「조선 총독부」건물이 지어졌다.
그런 연후 궁궐의 중심부를 시야에서 차단하여 역사의 관념을 지
워버리려 했으나 다행스럽게도 오늘날 그 옛 모습으로 근간에
복원되어 중심축을 이루니 궁궐의 본래 모습이 조금씩 되살아 나
고 있다.
간혹, 역사의식 없이 구 조선총독부 건물에 대한 미련을 가진 분이 계시다면 궁궐은 ‘건축’만을 감상하는 곳이기보다 "역사를 음미하는" 장소임을 생각해주시기를 바란다.
영제교
흥례문을 들어서 근정전으로 나아가기 전 또 하나의 통과례를
거치는 곳. 일반사회의 공간에서 지엄하신 공간으로의 이동은
무언가 마음속으로 생각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곳은
서에서 동으로 금천(禁川)이 흐르고 다리가 놓이는데 바로
영제교라 한다. 금천의 의미는 잡스러운 것이 함부로 근접하지 말라는 것으로 해석되며 이는 마치 사찰을 방문할 때 중생의 세계와 부처의 세계를 경계짓는 상징물과 같다.
금천에 흐르는 물은 명당수라 칭하며 행여 사악한 것이 물줄기를
타고 접근할 새라 파수꾼의 역할을 하는 서수가 영제교를 중심으
로 네 마리가 버티고 있다. 또한 영제교 위에도 네 마리의 서수가 있어 다리를 건너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나 언행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
여러분도 이러한 상징물들의 의미를 헤아려보면서 조선조 궁궐을 드나들던 관리들처럼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영제교를 건너 보신다면...
근정문, 근정전
궁궐(宮闕)은 나라를 다스리는 왕과 그 가족들이 거처하던 곳이며 그 외 나라를 다스리는 곳, 즉 통치를 하는 공적인 공간이다.
근정전은 이 공적인 공간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
는 국가적 큰 행사로, 조하(朝賀)라고 해서 군신간에 연초 하례가
있고 조회(朝會), 즉위식(卽位式), 책봉례(冊封禮), 고급관리
임용식, 사신영접(중국) 등 국가의 대사가 행하여졌다.
중심건물인 근정전은 궁궐 내 가장 높은 건물로 상, 하 월대와 돌
난간을 두루고 난간의 모퉁이에는 12지신상 및 방위신상의 서수를 조각하여 위용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표현해 놓았다.
그 외에 답도, 드므, 정, 품계석, 박석, 근정전내 어좌, 보개, 일월오봉병 등 보고 느끼고 생각할 것이 많은 조선조의 조정이 있는 곳이다.
사정전
근정전이 큰 행사의 공간이라면 사정전 권역은 구체적 통치행위
가이루어진 실질적 업무공간이다. 이곳에는 두 개의 부속건물도 자리하는데 동쪽에는 만춘전, 서쪽에는 천추전이 있으며 두 부속건물은 아궁이가 있어 난방이 가능하나 중심건물 사정전은 마루로 되어 있어 계절에 따라 용도를 달리하였나 보다.
사정전은 생각 思, 정치할 政, 곧 만백성을 생각해 가면서 어진 정치를 행하여 달라는 염원을 담아내고 있다.
조선의 통치이념인 유교적 도덕률을 엿볼 수 있는데 근정전도 근
면한 마음으로 정치를 행해 달라는 의미와 연관된다.
조선의 군주는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폭군이 아니라 따뜻한 어버이이기를 바랬다.
수정전, 궐내각사
현재 수정전은 고종 때 중수한 것으로 고종의 집무실(편전), 개혁 기구인 군국기무처, 내각청사, 일제의 물산공진회 때는 전시관으로 1960년대에는 민속관, 전시관으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조선 전기로 올라가면 역사적 유래가 의미심장한 곳이다.
세종연간에 집현전이있던 곳. 한글창제와 깊은 연관이 있는 곳이며 당시 엘리트 집단의 근무처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이 일대를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궁궐 내 관청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를 궐내각사라고 한다.
지금은 그 건물들의 자취를 느낄 수 없으므로 궁궐기능이 왜곡되
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데 현재 잔디와 나무로 단장되어 있는
공간이 과거엔 관청으로 꽉 들어차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궁궐은 잔디와 나무가 아무 곳에나 있지 않았으며, 공원 놀이마당 정원 같은 곳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유념하길 바란다.
경회루
경복궁을 찾는 모든 관람객이 최고로 여기는 장소 중 하나이다.
웅장하고, 늠름한 자태의 경회루를 바라보면 조선건축의 아름다
움에 반하고 만다. 현재도 그러하거니와 과거에는 더욱더 경외의
대상이었다. 바로 앞 궐내각사에 근무하던 관리들도 높은 담장으
로 막혀 함부로 접근할 수 없었던 왕실전용 연회의 공간이자 사신 접대의 장소인 경회루. 1, 2층 기둥의 재료와 그 모양새, 천원지방(天圓地方)과 주역원리(周易原理)의 동양사상을 표현한 건축술, 또 인공섬 세 개를 만들어 봉래, 방장, 영주라는 전설의 삼신산을 상징화한 의미있는 구도, 동양 제일의 누마루 집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건축미를 자랑한다.
또한, 실용성을 도입한 경회루 3개 다리의 배치, 지붕 잡상의 궁궐 내 최다 배열 등 어느 하나 소홀히 보아 넘길 수 없는 곳이 이곳이다. <국보 제224호로 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