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과 종묘 알아보기 [사직]

궁궐길라잡이
2017-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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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단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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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초 정선이 그린 그림으로 사직단과 단을 둘러싼 유와 둘레담
사직(社稷)은 종묘(宗廟)와 함께 조선의 근본이자 기강을 대변하는 것으로 국가의 가장 큰 제사를 모시는 곳이기도 하다. 사(社)는 토지의 신, 직(稷)은 오곡의 신을 말하며,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해 단을 쌓은 곳이 바로 인왕산 아래에 위치한 사직단이다.- 삼국시대의 사직

조선시대 이전부터 사직단을 세워 제사를 올렸다는 기록들이 있다. 예로부터 나라를 세우면 사직단을 조성하여 나라의 근간인 백성들이 윤택한 삶을 기원하며, 영토 유지와 백성들의 단결을 위한 장치로 활용했다. 삼국시대에는 백제 온조왕 20년 봄 2월에 하늘과 땅에 제사할 단(壇)을 설치했다.

고구려 고국양왕(384~391) 9년에는 국사(國社)를 세우고 겨울에 사직에다 제사를 올렸다. 신라 선덕왕 4년에 처음 사직단을 쌓았다고 한다. 삼국시대의 사직에 대한 기록이 불충분하여 구체적으로 어떻게 단(壇)을 조성하고 제사를 운영했는지는 알 수 없다.

- 고려시대의 사직

고려시대 성종 10년(991년)에 처음으로 왕성(王城,현재의 개경) 불은사(佛恩寺) 서동(西洞)에 사직단을 만들었다. 이때부터 사직이 제사 의례의 한 형태로서 정비가 되어갔다. 현종 5년(1014년)에는 중추사 강감찬이 사직단을 수축하고 제례의 규정을 새로이 마련하고, 문종 6년(1052년)에는 황성(皇城) 안 서족에 사직단을 새로 쌓고 왕이 친히 사직단에 가서 제사를 지낸 다음 “사직에 후토 구룡씨(后土 句龍氏)를 배향하고, 그 제주(題主)와 축문(祝文)에는 이름을 칭하지 않고 구룡(句龍)을 고쳐 후토씨(后土氏)로 하라” 하였다.

의종 때에는 사직 제례를 자세히 정비를 했다. 제삿날을 중춘(仲春), 중추(仲秋)의 첫 번째 무일(戊日)과 납일(臘日)로 하고, 태사(太社), 태직(太稷)의 자리는 단 위에 남향하여 모두 볏집 자리를 깔고, 후토(后土), 후직(后稷)의 자리는 단 위에 동향하여 왕골자리를 깔았다. 전체적으로 고려시대는 중국의 당나라와 송나라 제대로를 기본저긍로 따르기는 했지만 차이가 있고, 고려의 사직단은 단이 넓은 대신에 사직단을 두르는 담장인 유(壝)를 만들지 않았다.

- 조선시대의 사직

조선의 사직은 중국 주나라 국가 행정 조직 및 권한 등 규정을 기술한 경서인 『주례(周禮)』의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칙에 따라 경복궁에서 남쪽으로 향했을 때 오른쪽에 해당하는 인왕산 자락에 위치하게 되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이성계)는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할 때 종묘와 함께 사직을 가장 먼저 조성한 것으로 태조 4년(1395년) 정월에 시작한 공사가 4월에 완성이 되었다.

태종 6년(1406년) 6월에는 주변 지형에 맞춰 사직단을 정비하면서 지방 고을에도 사직단을 설치하도록 했다. 한양에 위치한 사직단의 동쪽과 서쪽에 두 개의 단을 나란히 만들어 동쪽에는 토지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제단인 사단(社壇), 서쪽에는 곡식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제단인 직단(稷壇)을 배치했다. 태종 14년(1414년) 6월에 단 주위에 담을 둘렀고, 담 안에 신실과 신문을 세웠다. 사직단을 관리하는 사직서는 세종 8년(1426년)에 담장 밖 북쪽에 설치하였다.
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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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문은 보물 177호로 사직단의 정문으로 태조 3년(1394) 사직단을 지을 때 함께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버렸다. 그 뒤 숙종 46년(1720) 큰 바람에 기운 것을 다시 세웠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으로 미루어 임진왜란 후에 새로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지금 있는 자리는 1962년 서울시 도시 계획에 따라 14m 뒤쪽으로 옮긴 것이다.

북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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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로와 어로sinroeoro.jpg
북신문은 신문 중에서 위계가 가장 높아 삼문으로 되어있다. 제사를 행할때 향, 축, 폐가 들어 가는 문이다.향, 축, 폐가 들어가는 신로와 왕이 이동하는 어로이다, 건너편 오른쪽의 신실에서 신위행로를 따라 위판이 남신문쪽에서 들어온다.
판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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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단과 국직단sajig.jpg
제사 때 왕이 서있는 판위와 왕이 서신문에서 판위로 이르는 길이 어로이다.동쪽은 토지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국사단이고 서쪽은 곡식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국직단이다. 신좌는 각각 북쪽에 있다.
제사는 1년에 네 차례, 2월과 8월 그리고 동지와 섣달 그믐에 지냈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나 가뭄에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 그리고 풍년을 비는 기곡제들을 이 곳에서 지냈다.
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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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문과 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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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은 천원지방의 우주관에 따라 네모나게 만들었으며 천지인 사상에 따라 3단으로 설치하였다. 오방색(동쪽은 청색, 서쪽은 백색, 남쪽은 적색, 북쪽은 흑색, 중앙은 황색)을 각 방위에 넣고 국토를 상징하는 황토로 덮었다.신의 영역인 유원으로 들어가는 유문. 단에는 석주를 각기 세워 후토씨와 후직씨를 배향하였다.
안향청
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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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향청은 재궁으로 쓰인 사직서의 중심 건물로 숙종 때부터 안향청이라 불렸다.각 단 아래 북쪽에 제물을 바치고 제물의 일부와 축과 폐를 태우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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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사직대제

복원 계획에 있는 사직 영역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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