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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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는 조선왕조의 역대 왕과 왕비,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을 봉안하고 제사를 받드는 곳이다. 조선왕조를 건국한 태조는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제일 먼저 경복궁의 동쪽에 종료를 건립하고 서쪽에 사직단을 세웠다. 이는 '좌묘우사' 즉 임금이 궁궐을 중심으로 남쪽을 향했을 때 왼쪽에 종묘, 오른쪽에 사직을 둔다는 중국 유교 예법에 따른 것이다. 현재의 종묘는 정전과 영녕전을 의미하지만, 조선시대의 종묘란 원래 정전만을 지칭하는 말이다. 정전 건물은 1395년(태조 3년)에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9월해 완공되었고 별묘인 영녕전은 세종 3년에 세워졌다. 정전과 영녕전은 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1608년 광해군 즉위년에 재건되었고 그 후 몇 차례 증축을 거쳐 지금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궁궐이 왕의 정치, 생활공간이면 종묘는 선왕(혼)들의 공간이며 왕통의 정통성을 부여하며 사직과 더불어 국가의 근본, 왕조의 존속을 상징해왔다. 사적 제125호인 종묘는 뛰어난 건축적 가치와 600년이 넘도록 이어져온 제례행사 등의 문화적 가치가 인정되어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어 2001년에는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이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외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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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의 정문은 고유의 이름이 없이 외대문이라 부른다. 궁궐의 정문과는 구조 형태가 다르며 단청은 화려하지 않게 단순하게 처리하였다. 또한 중층의 웅장한 지붕이 아닌 장식과 꾸밈이 없는 맛배지붕과 두터운 판문 위에는 홍살을 설치하여 이곳이 종묘의 대문으로서 신이 사는 신성한 곳임을 나타낸다. 삼문형식에 맛배지붕, 홑처마, 연등천장을 하였고 원주 위에는 2익공을 구성하였으며 용마루에는 양성회칠을 하여 용두를 얹고 내리마루에 잡상을 배치했다. 기단은 현재 단벌의 장대석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전면 중앙 5단의 계단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시대에 도로 조성으로 인해 계단은 땅에 묻히게 되었다. 현재는 도로면이 높아져 소맷돌 끝부분만 노출되어 있다.외대문에서 정전과 영년전의 남문으로 이어지는 신로 가운데 길은 향로, 축문, 폐백과 제사 예물이 가는 신향로이기도 하다. |
망묘루 |
망묘루라는 뜻은 '정전을 바라보며 선왕과 종묘사직을 생각한다.'이다. 종묘의 관원이 업무를 보는 곳으로 종묘에서 유일한 팔작지붕 형태를 가진 건물로 1칸은 장주초석을 사용한 누마루이다. 임금이 제례 때 머물면서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도서를 보관하고 그림을 걸어두기도 했다. 영조는 제례를 미친 후 환궁하면서 이곳에 들러 친히 시를 지어 망묘루안에 그 현판을 걸게 하였고 많은 어제시와 어제문을 써서 이곳에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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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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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은 고려 31대 왕이며 고려말기에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국권회복을 위해 노력했던 개혁 군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의 정식 이름은 고려공민왕영정봉안지당(高麗恭愍王影幀奉安之堂)이며 건물 내부에 공민왕과 노국대장 공주가 함께 있는 영정과 그의 애마를 그린 준마도가 보관되어 있다. 종묘에 신당이 있는 이유는 여러 설이 있다. 개국초기에 태조가 공민왕을 기리기 위해 지었다는 설, 역성혁명에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지었다는 설, 한국전쟁 전란 이후 지어졌다는 설이 있다. 확실한 사실은 성종, 숙종, 영조대의 '종묘전도', 정조대의 '춘관통고',의 의궤에 신당의 도면이 나타나 있지 않고 실록에도 신당의 설립에 대한 기록이 없다. |
못(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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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조화되어야 그 땅이 생기가 있고 길하다는 풍수와 음양사상을 배경으로 조성되었다. 못 가운데 둥근 섬에는 향나무를 심어 종묘가 제례의 공간임을 나타냈다. 종묘는 즐기는 공간이 아니었기에 연꽃을 심지 않았고 물고기도 기르지 않았다. 현재의 종묘에는 못이 3개 있는데 그 중 정전 남쪽에 있는 못은 세종대에 만들어진 것이며 망묘루 앞에 있는 못은 숙종대의 종묘의궤의 종묘전도에 나타나 있어 이때 또는 이전에 조성된 못이다. 외대문 옆에 있는 못은 종묘의궤와 실록에 나타나지 않고 있어 일제강점기때 조성된 거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때 작성된 종묘일지 성격의 기록물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
향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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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대(태조 13년, 1413년)에 향대청 건물이 재전보다 높다하여 이곳 남동쪽 낮은 곳으로 옮겨졌다. 향청과 집사청으로 나뉘는데 앞건물 향청은 제사 때 사용되는 향, 축문, 폐백과 제사 예물을 보관하는 곳, 뒤 건물은 제향에 참석할 제관들이 제사 전날 마지막 재계를 이곳에서 치르며 제례준비를 하던 곳이다. 예전에는 향관청, 집사청, 향청 등으로 다양하게 불렸으며 현재는 신실과 제기의 전시실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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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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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궁은 다른 말로 재전, 어숙실이라고도 불린다. 3동의 건물로 북쪽은 어숙실, 동쪽은 세자실이고 서쪽은 어목욕청이라 하며, 각 건물을 잇는 어도가 십자형으로 설치되어있다. 임금이 제례를 행하기 하루 전날 재궁에 도착하여 다음 날 밤 1시(축시, 오전 1시)가 되어 제례를 올릴 때까지 머물며 마지막 날 재계를 하는 곳으로 목욕재계하고 의복을 정제하며 세자와 함께 제례를 올릴 준비를 하던 곳이다. 종묘제례가 있기 전 임금은 몸과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 재계를 하는데, 제의를 지내기 전에 4일 동안은 산재하고 그 다음 3일 동안은 치재를 한다. 산재 기간에는 문병, 문상은 가지 않고 살생문서를 취급하지 않으며 잠자리, 음악 등 금욕생활로 지낸다. 치재 기간에는 정사업무는 뒤로 물리고 오로지 제사에 관한 업무만 다룬다. |
전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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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청은 신주라고도 하며 종묘제례에 사용되는 제수를 장만하고 제물, 제기 및 운반구를 포함하는 여러 가지 기구들을 보관하던 곳이다. 주실은 부엌으로 동편에는 온돌과 마루방을 들여 행각을 꾸몄으며 동쪽에 제수를 장만 보관하는 제수칸, 서쪽은 창고, 남쪽은 행랑과 정문이 있으며 뜰에는 절구 같은 4개의 돌이 남아 있다. 원래 이곳에는 성생의식을 거친 희생인 삼생(소․양․돼지)을 도살하는 공간이 따로 있었으며 제사 음식을 조리하기 위한 솥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
정전 |
왕과 왕비의 승하 후 궁궐에서 삼년상을 치른 다음에 그 신주를 옮겨와 모시는 건물로 종묘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며 국보(제227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전에는 태조로부터 27대 순종에 이르기까지 19실 49위 역대제왕과 그 왕비의 옮기지 않는 불천위(不遷之位) 신주를 모시고 있다. 정전은 내부에 모실 신위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몇 차례에 걸쳐 동쪽으로 증축하여 늘렸다. 종묘 정전의 서쪽에는 조묘 또는 별묘라 부르는 영녕전이 있는데 이곳에는 추존 4위로부터 영왕에 이르기까지 16실에 34위의 조천된 왕과 그 왕비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남문은 신문으로 혼백이 드나드는 문이며 동문은 제례 때 제관이 출입하고 서문은 악공, 춤을 추는 일무원, 종사원이 출입한다.종묘제례는 유교예법에 따라 신을 맞는 절차인 신관례, 신을 즐겁게 하는 절차인 천조례․초헌례․아헌례․종헌례, 신이 베푸는 절차인 음복례, 신을 보내드리는 철변두․송신례․망료례로 구분하여 종묘제례악에 맞추어 진행된다. 왕을 비롯한 왕세자, 문무백관, 여러 제관을 포함한 가장 격식이 높고 큰 제사로서 밤중(약 1시부터 새벽까지)에 횃불을 키고 진중하고 엄숙하게 지낸다. 정전에서는 사계절의 각 첫 달에 정해진 날과 섣달 그믐(납일)을 합쳐 일년에 다섯 번, 영녕전에서는 봄․가을․납일 정해진 날에 3번 봉행한다. 제례 이외에도 국가에 중요한 일이 있으면 빌거나 알리는 기원제, 고유제 의식을 종묘에서 먼저 행한 다음 시행한다. |
공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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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신당은 배향공신의 신위를 모신 곳, 창건 당시 5간에 불과하였으나 정전에서 모시는 왕의 신위가 늘어남에 따라 현재 83위를 모신 16간의 건물이 되었다. 종묘 창건 당시 정전 담밖에 있던 공신당을 태종대(태종 10년, 1410년)에 담 안쪽으로 옮겼다. 배향공신은 임금이 운명한 후 그 임금의 신주를 종묘에 부묘할 때쯤 선정되며 임금의 신주를 종묘에 부묘할 때 동시에 배향공신의 신주도 공신당에 모셔지게 된다. 배향공신을 위한 제사는 종묘제례와 연계되어 봄․여름․가을․겨울 초와 모두 지내며 납일에는 친향이 아니면 지내지 않는다. 생전에 모셨던 왕의 신주가 정전에서 영녕전으로 조천되면 영녕전에는 따로 공신당이 없기에 종묘에 배향되어졌던 그 공신의 신위는 공신당에 남아 있을 수 없어 가족에게 전해진다. |
칠사당 |
칠사당은 토속신앙과 유교사상이 합쳐진 사당으로 민간신앙의 신적 대상이기도 하였던 7신을 위한 제사, 즉 칠사를 국가의 정례인 국조오례의에 소사로 편입시켜 종묘제례와 연계하여 모신다. 칠사란 봄․여름․가을․겨울과 운행되며 인간의 운명, 궁궐이나 집의 문, 부뚜막과 음식, 성문을 관장하며 출입을 주관하는 등 실생활과 밀접한 신이다. 이 칠사에게 왕가와 궁궐의 모든 일과 만백성의 생활이 아무 탈 없이 잘 풀리도록 제사이다. 정확한 건축연대는 알지 못하며 성종대 국조오례의에 표시된 것으로 보아 공신당과 비슷한 시기(태종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
영녕전 |
세종대(세종 3년 1421년)에 정전에 모시던 태조의 4조인 목조․도조․익조․환조와 왕비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세워졌으며 조묘 혹은 별묘라고도 한다. 영녕전의 뜻은 "왕가의 조상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이다. 조천되어진 왕과 왕비의 신주를 포함하여 추존왕 8위 그리고 마지막 황태자 1위, 모두 16위의 신주와 그들의 왕비 및 황태자비의 신주 34위가 모셔져 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광해군 원년 정전과 함께 중건, 정전은 명종대 증축한 모습 그대로 증건했지만 영녕전은 좌우익실 3간으로 기존 2간에서 1간 더 증축됐다. 이후 현종대 동서로 각 1간 증축, 헌종대에 동서로 각 2칸 증축되어 16칸이 되어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
정전과 차이가 있다면 태조의 4조를 모신 중앙 4간을 좌우익실 각 6간보다 높게 하여 위계를 달리 하였다. 신실의 구성과 월대의 판위․료대 그리고 남신문․동문․서문은 정전과 크게 다름이 없이 약간 작고 전체 건물 규모도 정전보다 좀 작다. 보물(제821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사청은 언제 철거 되었는지 현재는 남아있지 않으며 옛날 전사청 터인 듯 주춧돌만 놓여 있다. |
악공청 |
종묘에는 2개의 악공청이 있으며 정전과 영녕전 서쪽 편에 있다. 종묘제례 때 음악을 담당하는 악공들이 악기를 준비하고 기다리며 연습하던 장소로써 서문을 통해 정전과 영녕전을 드나든다. 지금은 관람객의 휴식공간으로 사용되는 건물로 현재의 악공청 건물은 원래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
현재의 종묘는 정전과 영녕전을 의미하지만, 조선시대의 종묘란 원래 정전만을 지칭하는 말이다. 정전 건물은 1395년(태조 3년)에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9월해 완공되었고 별묘인 영녕전은 세종 3년에 세워졌다.
정전과 영녕전은 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1608년 광해군 즉위년에 재건되었고 그 후 몇 차례 증축을 거쳐 지금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궁궐이 왕의 정치, 생활공간이면 종묘는 선왕(혼)들의 공간이며 왕통의 정통성을 부여하며 사직과 더불어 국가의 근본, 왕조의 존속을 상징해왔다. 사적 제125호인 종묘는 뛰어난 건축적 가치와 600년이 넘도록 이어져온 제례행사 등의 문화적 가치가 인정되어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어 2001년에는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이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종묘의 정문은 고유의 이름이 없이 외대문이라 부른다. 궁궐의 정문과는 구조 형태가 다르며 단청은 화려하지 않게 단순하게 처리하였다. 또한 중층의 웅장한 지붕이 아닌 장식과 꾸밈이 없는 맛배지붕과 두터운 판문 위에는 홍살을 설치하여 이곳이 종묘의 대문으로서 신이 사는 신성한 곳임을 나타낸다.
삼문형식에 맛배지붕, 홑처마, 연등천장을 하였고 원주 위에는 2익공을 구성하였으며 용마루에는 양성회칠을 하여 용두를 얹고 내리마루에 잡상을 배치했다. 기단은 현재 단벌의 장대석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전면 중앙 5단의 계단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시대에 도로 조성으로 인해 계단은 땅에 묻히게 되었다. 현재는 도로면이 높아져 소맷돌 끝부분만 노출되어 있다.외대문에서 정전과 영년전의 남문으로 이어지는 신로 가운데 길은 향로, 축문, 폐백과 제사 예물이 가는 신향로이기도 하다.
망묘루
망묘루라는 뜻은 '정전을 바라보며 선왕과 종묘사직을 생각한다.'이다. 종묘의 관원이 업무를 보는 곳으로 종묘에서 유일한 팔작지붕 형태를 가진 건물로 1칸은 장주초석을 사용한 누마루이다. 임금이 제례 때 머물면서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도서를 보관하고 그림을 걸어두기도 했다. 영조는 제례를 미친 후 환궁하면서 이곳에 들러 친히 시를 지어 망묘루안에 그 현판을 걸게 하였고 많은 어제시와 어제문을 써서 이곳에 남겼다.
공민왕신당
공민왕은 고려 31대 왕이며 고려말기에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국권회복을 위해 노력했던 개혁 군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의 정식 이름은 고려공민왕영정봉안지당(高麗恭愍王影幀奉安之堂)이며 건물 내부에 공민왕과 노국대장 공주가 함께 있는 영정과 그의 애마를 그린 준마도가 보관되어 있다.
종묘에 신당이 있는 이유는 여러 설이 있다. 개국초기에 태조가 공민왕을 기리기 위해 지었다는 설, 역성혁명에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지었다는 설, 한국전쟁 전란 이후 지어졌다는 설이 있다.
확실한 사실은 성종, 숙종, 영조대의 '종묘전도', 정조대의 '춘관통고',의 의궤에 신당의 도면이 나타나 있지 않고 실록에도 신당의 설립에 대한 기록이 없다.
서로 조화되어야 그 땅이 생기가 있고 길하다는 풍수와 음양사상을 배경으로 조성되었다. 못 가운데 둥근 섬에는 향나무를 심어 종묘가 제례의 공간임을 나타냈다. 종묘는 즐기는 공간이 아니었기에 연꽃을 심지 않았고 물고기도 기르지 않았다.
현재의 종묘에는 못이 3개 있는데 그 중 정전 남쪽에 있는 못은 세종대에 만들어진 것이며 망묘루 앞에 있는 못은 숙종대의 종묘의궤의 종묘전도에 나타나 있어 이때 또는 이전에 조성된 못이다.
외대문 옆에 있는 못은 종묘의궤와 실록에 나타나지 않고 있어 일제강점기때 조성된 거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때 작성된 종묘일지 성격의 기록물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태조대(태조 13년, 1413년)에 향대청 건물이 재전보다 높다하여 이곳 남동쪽 낮은 곳으로 옮겨졌다. 향청과 집사청으로 나뉘는데 앞건물 향청은 제사 때 사용되는 향, 축문, 폐백과 제사 예물을 보관하는 곳, 뒤 건물은 제향에 참석할 제관들이 제사 전날 마지막 재계를 이곳에서 치르며 제례준비를 하던 곳이다.
예전에는 향관청, 집사청, 향청 등으로 다양하게 불렸으며 현재는 신실과 제기의 전시실로 사용하고 있다.
재궁은 다른 말로 재전, 어숙실이라고도 불린다. 3동의 건물로 북쪽은 어숙실, 동쪽은 세자실이고 서쪽은 어목욕청이라 하며, 각 건물을 잇는 어도가 십자형으로 설치되어있다.
임금이 제례를 행하기 하루 전날 재궁에 도착하여 다음 날 밤 1시(축시, 오전 1시)가 되어 제례를 올릴 때까지 머물며 마지막 날 재계를 하는 곳으로 목욕재계하고 의복을 정제하며 세자와 함께 제례를 올릴 준비를 하던 곳이다.
종묘제례가 있기 전 임금은 몸과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 재계를 하는데, 제의를 지내기 전에 4일 동안은 산재하고 그 다음 3일 동안은 치재를 한다. 산재 기간에는 문병, 문상은 가지 않고 살생문서를 취급하지 않으며 잠자리, 음악 등 금욕생활로 지낸다. 치재 기간에는 정사업무는 뒤로 물리고 오로지 제사에 관한 업무만 다룬다.
전사청은 신주라고도 하며 종묘제례에 사용되는 제수를 장만하고 제물, 제기 및 운반구를 포함하는 여러 가지 기구들을 보관하던 곳이다. 주실은 부엌으로 동편에는 온돌과 마루방을 들여 행각을 꾸몄으며 동쪽에 제수를 장만 보관하는 제수칸, 서쪽은 창고, 남쪽은 행랑과 정문이 있으며 뜰에는 절구 같은 4개의 돌이 남아 있다.
원래 이곳에는 성생의식을 거친 희생인 삼생(소․양․돼지)을 도살하는 공간이 따로 있었으며 제사 음식을 조리하기 위한 솥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정전
왕과 왕비의 승하 후 궁궐에서 삼년상을 치른 다음에 그 신주를 옮겨와 모시는 건물로 종묘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며 국보(제227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전에는 태조로부터 27대 순종에 이르기까지 19실 49위 역대제왕과 그 왕비의 옮기지 않는 불천위(不遷之位) 신주를 모시고 있다. 정전은 내부에 모실 신위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몇 차례에 걸쳐 동쪽으로 증축하여 늘렸다.
종묘 정전의 서쪽에는 조묘 또는 별묘라 부르는 영녕전이 있는데 이곳에는 추존 4위로부터 영왕에 이르기까지 16실에 34위의 조천된 왕과 그 왕비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남문은 신문으로 혼백이 드나드는 문이며 동문은 제례 때 제관이 출입하고 서문은 악공, 춤을 추는 일무원, 종사원이 출입한다.종묘제례는 유교예법에 따라 신을 맞는 절차인 신관례, 신을 즐겁게 하는 절차인 천조례․초헌례․아헌례․종헌례, 신이 베푸는 절차인 음복례, 신을 보내드리는 철변두․송신례․망료례로 구분하여 종묘제례악에 맞추어 진행된다.
왕을 비롯한 왕세자, 문무백관, 여러 제관을 포함한 가장 격식이 높고 큰 제사로서 밤중(약 1시부터 새벽까지)에 횃불을 키고 진중하고 엄숙하게 지낸다.
정전에서는 사계절의 각 첫 달에 정해진 날과 섣달 그믐(납일)을 합쳐 일년에 다섯 번, 영녕전에서는 봄․가을․납일 정해진 날에 3번 봉행한다. 제례 이외에도 국가에 중요한 일이 있으면 빌거나 알리는 기원제, 고유제 의식을 종묘에서 먼저 행한 다음 시행한다.
공신당은 배향공신의 신위를 모신 곳, 창건 당시 5간에 불과하였으나 정전에서 모시는 왕의 신위가 늘어남에 따라 현재 83위를 모신 16간의 건물이 되었다. 종묘 창건 당시 정전 담밖에 있던 공신당을 태종대(태종 10년, 1410년)에 담 안쪽으로 옮겼다.
배향공신은 임금이 운명한 후 그 임금의 신주를 종묘에 부묘할 때쯤 선정되며 임금의 신주를 종묘에 부묘할 때 동시에 배향공신의 신주도 공신당에 모셔지게 된다.
배향공신을 위한 제사는 종묘제례와 연계되어 봄․여름․가을․겨울 초와 모두 지내며 납일에는 친향이 아니면 지내지 않는다.
생전에 모셨던 왕의 신주가 정전에서 영녕전으로 조천되면 영녕전에는 따로 공신당이 없기에 종묘에 배향되어졌던 그 공신의 신위는 공신당에 남아 있을 수 없어 가족에게 전해진다.
칠사당은 토속신앙과 유교사상이 합쳐진 사당으로 민간신앙의 신적 대상이기도 하였던 7신을 위한 제사, 즉 칠사를 국가의 정례인 국조오례의에 소사로 편입시켜 종묘제례와 연계하여 모신다.
칠사란 봄․여름․가을․겨울과 운행되며 인간의 운명, 궁궐이나 집의 문, 부뚜막과 음식, 성문을 관장하며 출입을 주관하는 등 실생활과 밀접한 신이다. 이 칠사에게 왕가와 궁궐의 모든 일과 만백성의 생활이 아무 탈 없이 잘 풀리도록 제사이다.
정확한 건축연대는 알지 못하며 성종대 국조오례의에 표시된 것으로 보아 공신당과 비슷한 시기(태종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영녕전
세종대(세종 3년 1421년)에 정전에 모시던 태조의 4조인 목조․도조․익조․환조와 왕비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세워졌으며 조묘 혹은 별묘라고도 한다. 영녕전의 뜻은 "왕가의 조상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이다.
조천되어진 왕과 왕비의 신주를 포함하여 추존왕 8위 그리고 마지막 황태자 1위, 모두 16위의 신주와 그들의 왕비 및 황태자비의 신주 34위가 모셔져 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광해군 원년 정전과 함께 중건, 정전은 명종대 증축한 모습 그대로 증건했지만 영녕전은 좌우익실 3간으로 기존 2간에서 1간 더 증축됐다. 이후 현종대 동서로 각 1간 증축, 헌종대에 동서로 각 2칸 증축되어 16칸이 되어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전사청은 언제 철거 되었는지 현재는 남아있지 않으며 옛날 전사청 터인 듯 주춧돌만 놓여 있다.
악공청
종묘에는 2개의 악공청이 있으며 정전과 영녕전 서쪽 편에 있다. 종묘제례 때 음악을 담당하는 악공들이 악기를 준비하고 기다리며 연습하던 장소로써 서문을 통해 정전과 영녕전을 드나든다.
지금은 관람객의 휴식공간으로 사용되는 건물로 현재의 악공청 건물은 원래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