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과 종묘 알아보기 [경희궁]

궁궐길라잡이
2017-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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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의 역사khmain.jpg성종이후 약 100여 년간 경복궁과 동궐 양궐체제는 큰 변동 없이 유지되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으로 세 궁궐과 종묘는 완전 파괴되었다. 왜란이 끝나자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종묘와 경복궁의 중건 준비를 하였으나 경복궁의 경우는 물자부족으로 공사는 지연되었고 중건 대사상도 경복궁에서 창덕궁으로 바뀌었다.

광해군 즉위년인 1608년에 종묘가 완공되었고 다음 해에 창덕궁과 창경궁이 거의 완공되었다. 1611년 광해군은 정릉동 행궁을 떠나 창덕궁으로 이어하였고 이어한 뒤에도 인근의 창경궁을 보하는 공사를 지속시켰다.

그러한 가운데 인왕산 아래에 새 궁궐인 인경궁을 영건하는 공사를 벌였다. 신료들은 법궁이었던 경복궁을 버려두고 새로운 궁궐을 짓는 것은 불합리한 처사라 말이 많았지만 술사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강행되었다.

경덕궁의 창건

인경궁 공사가 한창 이루어지고 있는 1617년에 또 다른 술사가 새문동에 새 궁궐을 짓자는 주장을 하였다. 새문동에는 인조의 생부 정원군의 집터가 있었는데 광해군은 그 터에 궁궐을 지어야 한다는 술사의 말을 받아들여 새 궁궐을 짓기 시작했다. 처음 공사를 시작할 때는 새문동궁, 혹은 서별궁 등으로 부르다가 궁이 위치한 방명인 여경방에서 경덕궁이라는 궁명을 따왔다. 다른 이름으로는 야조개 또는 야주개 대궐 그리고 서궐이라 불렸다.

경덕궁 처소가 거의 다 조성이 되고 1623년 새로 지은 궁궐로 이어하기 위한 준비를 마쳤으나 결국에는 광해군은 인경궁과 경덕궁의 최종 완공을 보지 못하고 창덕궁에서 인조 반정을 맞고 말았다. 광해군은 새로운 궁궐을 영건하여 왕위의 정통성 및 정치적 지지기반의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삼았으나 오히려 그것이 광해군이 폐위되는 주요 요인이 되었다.

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법궁으로 사용하다가 1624년 이괄의 난으로 동궐이 소실되었기 때문에 인조는 경덕궁으로 임어하여 9년을 지냈다. 그리고 경덕궁과 함께 거의 완공되었던 인경궁은 인조 25년에 창덕궁을 대대적으로 수리하는 데 이용됨으로써 없어지게 되었다. 이로써 왕들은 창덕궁에 오래 임어하면서 경희궁을 오가는 새로운 양궐체제가 성립되었다.

경희궁의 위상 강화

숙종대에 이르러 경덕궁은 양궐체제로서 확실한 위상을 가졌다. 궁궐 경영을 정치적으로 밀접하게 이용하였던 숙종은 경덕궁 전각들에 대해 전반적인 공사를 벌이며 약 12년간 임어하며 적극 활용하였다. 영조대에 오면 경덕궁은 재위 기간 중 1/3이 넘는 약 18년 동안 사용되었다. 이때에 경덕궁은 경희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원종의 시호인 경덕과 같은 발음이라 하여 1760년 경희궁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후 철종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 임금들이 경희궁에 머물렀다. 경희궁에는 정전인 숭정전을 비롯하여 편전인 자정전, 침전인 융복전, 회상전 등 100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었다.

흥화문
경희궁의 정문으로 1618년에 건립하였으며 원래는 현재의 구세군 회관 자리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고 우진각 지붕이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에 비해 단층으로 지은 것은 창건 때 피우처로 지었기 때문이다. 정문은 죄인 신문이나 친국, 교서반포, 구휼, 문정 등이 행해졌다.

일제강점기 일제에 의해 경희궁 터에 일본인 학교인 경성중학교가 설립된 이후인 1932년 흥화문을 뜯어 옮겨 이토히로부미를 위한 사당인 박문사의 정문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1973년에는 신라호텔의 정문 구실을 하기도 하였다. 1988년 복원사업으로 현재 이 위치에 이전하여 복원하였다.
숭정전
1618년 건립되었던 숭정전의 동쪽에는 여춘문, 서쪽에는 의추문, 남쪽에는 숭정문 북쪽에는 자정문이 있었다. 이 숭정문에서 경종, 정조, 헌종이 즉위하였다.

숭정전은 창건 당시 융정전이라고 하였으며 조하를 받는 정전이다. 그 외에 연회, 사진접대, 과거시험, 망궐례, 세자빈 책봉, 교서반포 등이 이 조정에서 있었다. 경종 즉위 때 보면 숙종의 빈전이 자정전에 설치되었는데 자정문 밖 동쪽 뜰에 욕위를 설치하고, 욕위에서 빈전에서 가져온 대보를 받고, 여기서 사배례를 행한 후 걸어서 숭정문 동쪽 협문으로 나가서 정문 중앙에 놓여진 어좌에 나아갔다.
 이 건물은 서울시에서 1988년부터 경희궁지 복원계획을 수립하고 1990년에 숭정전을, 1991년에 숭정문을, 1993년부터 1994년까지 숭정전과 숭정문을 연결하는 동남쪽 행각과 서남쪽 행각을 복원하였다.

원래 있었던 숭정전은 일제가 경희궁을 훼손하면서 1926년 숭정전 건물을 일본인 사찰인 조계사에 팔았는데 동국대학교가 그 소유지를 수용하면서 동국대의 소유가 되었다. 현재는 동국대 정각원으로 남아있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지붕의 주심포 양식의 건물로서 1618년 창건된 이래 큰 피해를 입지 않아 조선 중기의 건축양식을 간직하고 있다.

 

자정전

'자정’은 정사를 돕는 다는 뜻을 가진 경희궁의 편전이다. 국왕과 신하들과 회의를 하거나 경연을 여는 등 공무를 수행하던 곳이다. 숙종이 승하하였을 때는 빈전으로 사용되었으며 영조대 종묘 수리시 임시 이안소로 쓰여 신주가 임시로 보관되기도 하였다.우물마루가 깔려 있는 다른 편전과 달리 정전처럼 내부 바닥에 전돌이 깔려 있다. 1988년 복원사업으로 서궐도안에 따라 현재의 자정전과 자정문을 복원하였다.

태령전영조가 자신의 어진을 보관하는 건물로 사용한 곳이며 영조 사후 혼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어진은 정조대에 창덕궁 선원전으로 옮겼다. 2000년에 서궐도안에 따라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로 복원하였다. 지금 있는 영조의 어진은 이후 두었다. 현판은 한석봉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들었다.

지금은 3개의 건물만 남아있지만 헌종대에 쓰여진 궁궐지와 1820년대 그려진 서궐도안에는 경희궁에는 문을 포함해서 약 120개의 건물이 있었다. 다른 궁궐처럼 국왕의 통치 공간인 외전에는 숭정전, 자정전, 태녕전이 있었고 왕과 왕비의 공간인 내전에는 회상전, 융복전 등이 있었다.


서암

암천으로 불리는 바위 속의 샘이 있어 예로부터 경희궁의 명물이었다고 한다. 본래는 왕기가 서린 것으로 알려진 ‘왕암’으로 불리었는데 그 이름으로 인하여 광해군이 이 지역에 경희궁을 지었다는 속설도 있다. 숙종대 1708년에 이름을 상서로운 바위라는 뜻으로 서암이라 고치고 직접 ‘瑞巖’ 두 글자를 크게 써서 새겨 두게 하였다고 하나, 현재 서암을 새겨두었다던 돌기둥은 전해지지 않는다.

역대 조선의 왕 중 경희궁에 가장 자주 이어하고 가장 오랜 기간 머물렀던 영조는 이 암반을 신하들과 자주 찾아 시를 짓곤 했다. 영조는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후원에 올라 서암을 함께 구경한 뒤에 친히 한 구의 시를 짓고 신하들에게 화답하는 시를 지어 올리라고 하는 여러 기록들이 실록에 남아있다.

고종·순종 연간의 경희궁

1863년 고종이 창덕궁에서 즉위하고 경복궁을 중건하여 경복궁으로 임어하였다. 이때 경복궁 중건 과정에서 경희궁의 숭정전 등 주요 전각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이 중건에 이용되거나 이건되었다. 고종의 경복궁 환어에 따라 경복궁은 법궁으로 창덕궁이 이궁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양궐체제에서 배제된 경희궁은 궁궐로서의 기능이 상실되어 빈 궁궐이 된 것이다. 1868년에는 경희궁내 공허지로 있던 터를 용동궁, 수진궁, 명례궁, 어의궁 등 4궁의 재정적인 뒷받침을 목적으로 분배하여 개간하도록 하여 경작지가 궁내에 들어섰다. 그래서 농민들을 동원한 경작이 이루어졌다.

1883부터는 대규모 양잠사업이 진행되어 경희궁에 뽕나무가 심어졌고 양잠소, 잠상공사가 설치되고 조폐국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자초소에서 실화가 발생하여 흥화문이 모두 파괴되고 인명피해가 30명이나 나는 큰 사고도 일어났다. 1889년에는 숭정문과 행각에 화재가 발생하여 복구하였다.

대한제국기의 변천

대한제국기에도 경희궁은 여전히 기능이 상실된 상태였다. 기념식, 관병식, 원유회 등이 이 공간에서 이루어졌다. 1898년 서대문 주변에 전차와 근대 문물이 대폭 수용되면서 1902년에는 경운궁부터 경희궁까지 홍교라 불리는 석재 구름다리인 연결 다리가 놓여 졌고 고종의 황학정 나들이 통로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현재 사직공원에 있는 황학정은 1890년에 회상전 북쪽에 지어진 건물로 활을 쏘는 곳 이였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제가 통감부를 설치하고 외교권을 장악한 후부터는 일본인 민단학교의 운동회, 친일 연설회 공간으로 전락되었다. 1907년 고종의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양위하고 순종이 즉위 후 부터는 경희궁은 왕실에서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의 변천

1910년 조선총독부가 경희궁 일대를 국유화하여 경희궁의 흔적이 대부분 사라지게 된다. 이때 남은 전각은 숭정전, 흥정당, 흥화문, 무덕문지 각 회랑과 회상전 북쪽에 건축된 황학정 뿐 이었다. 이 또한 숭정전과 일부 전각은 조선총독부 중학교, 뒤이어 경성중학교, 뒤이어 경성공립중학교 바뀌어 경희궁터에 자리잡게 된다. 경희궁 빈 땅은 학교 운동장으로 쓰였다. 1915년에는 흥화문이 경희궁 남쪽 도로 확장 시 동향에서 남향으로 바뀌었다.

해방 이후


경성중학교는 1945년 해방이후 국권 수복 후 폐교되었고 1946년부터 1980년까지 서울 중고등학교로 사용되었다. 현재 서울역사박물관이 들어서 있는 운동장에는 1945년부터 1946년까지 미육군 항공부대가 주둔하였으며 1950년 한국전쟁이후에는 주한 외국군 병영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일제 말기에 쓰이지 못했던 방공호가 전쟁 이후 복구 과정에서 잠시 사용되었다고 한다.

경희궁의 복원

1978년 서울고등학교는 서초동으로 이전 계획이 수립됨에 따라 서울시는 학교 부지를 현대건설에 매각하였고 동 그룹에서는 이곳에 사옥을 조성하려 했었다. 그러나 1980년에 경희궁지는 사적 271호로 지정되어 공원 녹지 확보 차원에서 이를 서울시가 재매입했다. 이후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에 맞추어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임시 사용할 목적으로 구 서울고 본관을 개보수하기도 했으나 1980년대 후반 이후 발굴 복원 작업이 본격화되면서 더 이상의 현상 변경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94년 흥화문이 이건되고 숭정전 및 숭정문이 복원 된 뒤 자정전 및 자정문, 태령전까지 복원되는 등 2002년에 1단계 복원 및 공원화 사업이 마무리 되어 일반에 공개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에 경희궁 동궁영역에 건립된 서울역사박물관이 개관되었다. 위와 같은 과정 중에 YMCA 청소년회관이 헐렸고 뒷산 서편에 자리잡았던 중앙기상청은 1998년에 신대방으로 이전했고 2002년에는 시립미술관도 경희궁지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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