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먹고 마시는 행사에 궁궐 활용말라!

궁궐길라잡이
2005-06-03
조회수 3909
먹고 마시는 행사에 궁궐 활용 말라
[기고] 궁궐지키기시민모임 천준호씨
오마이뉴스 ohmynews@ohmynews.com
역사왜곡을 노린 일제의 궁궐파괴... 명분은 '활용'

▲ 지난 1일 창경궁 명정전에서 열린 WAN총회 만찬에서 한 외국인 참가자가 품계석에 발을 올려놓고 있다.
ⓒ2005 우리궁궐길라잡이
궁궐은 우리 역사와 문화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문화유산이다. 동시에 많은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휴식과 교육의 공간이기도 하다. 과거 일제는 우리 역사와 전통을 상징하는 문화유산을 훼손하고 왜곡하였는데 대표적 사례가 바로 궁궐이다. 궁궐은 왕의 생활공간이자 조선 정치, 행정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일제는 궁궐의 여러 전각을 헐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박물관, 미술관을 지었고 지방사찰의 탑과 부도를 옮겨와 전시하기도 했다. 왕이 직접 농사를 짓던 논을 없애고 연못을 확장해 배를 띄웠으며,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었고 일본에서 수천 그루 '사쿠라'를 옮겨 심어 밤 벚꽃놀이를 했다. 궁궐 ‘창경궁’이 사냥, 놀이를 한다는 뜻의 ‘창경원’으로 전락한 것이다.

명분은 활용이었지만 그때부터 궁궐은 본래 모습보다 왕과 소수의 사람들이 권력싸움을 하던 공간으로, 유희와 놀이의 공간으로 왜곡되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후 궁궐을 찾는 사람들은 ‘패배감’과 ‘자괴감’을 느끼거나 아니면 역사적 공간이 아닌 단순한 ‘공원’이나 ‘산책코스’로 인식하는 ‘무감각증’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일제가 노린 궁궐 파괴와 왜곡의 의도인데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까지 그런 인식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궁궐의 본래 기능과 특성을 올바로 알리는 것은 일제에 의해 왜곡된 우리 문화를 바로잡는 중요한 일이다. 일본이 역사교과서를 왜곡할 때 일시적으로 흥분하고 말 게 아니라 주변 문화유산을 통해 우리 역사를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이는 우리 모두의 몫이다.

신문사, '경복궁 검사대회' 특권의식으로 비판하더니

이런 측면에서 이번 행사를 주관한 곳이 ‘한국신문협회’라는 사실은 참으로 아쉽고 걱정스럽다. 물론 양식 있는 다수 기자들 의견과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권력의 횡포를 감시하고 견제해야 할 언론사 사주들 모임에서 비뚤어진 특권의식을 보여준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한국신문협회장이 경영하는 언론사에서는 지난해 경복궁 경회루 검사대회를 두고 ‘잘못을 인정하는 않는 특권층’이란 제목으로 전직 대통령 아들과 비교하는 비판적 기사를 냈다. 이번에도 그런 기사를 기대한다면 무리한 요구일까. 또 평소 문화유산 보존과 역사의식 형성을 목소리 높여 외쳤던 신문사들이 이번에도 비판적 시각을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난해 경복궁 경회루 검사대회와 이번 행사처럼 우리 문화유산이 권력기관이나 특정단체들의 세 과시와 특권의식을 위해 더 이상 희생될 수는 없다. 그러나 전망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문화재청이 2일 해명자료를 통해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렸고, 지도감독을 철저히 했으며, 앞으로도 이런 행사를 허가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타난 사실 왜곡과 걱정스러운 활용정책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신문협회, 외국인 흡연 항의하는 시민단체 가로막기도

▲ 지난 1일 창경궁 명정전 입구에서 참석자들에게 제공된 맥주와 음료(왼쪽), 수거돼있는 맥주병과 음료캔
ⓒ2005 우리궁궐길리잡이
우선 문화재청 주장대로 ‘고궁의 아름다움과 문화의 우수성 널리 알리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궁궐내 만찬’은 적절한 방법이 아니다. 400여년 된 목조건물 앞에서 꼭 밥을 먹고 담배를 피워야 하는가. 1000여명의 참석자를 여러 조로 나눠 해설자와 함께 궁궐을 천천히 답사하도록 유도하면서 보고 듣고 느끼도록 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모 방송국과 인터뷰 한 외국인 참가자는 3시간 동안 만찬을 즐긴 명정전이 국가 보물에 해당하는 공간인지도 모르고 있었다고 하니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두 번째, 문화재청은 지도 및 감독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문화재청이 3월 29일자로 신문협회에 발송한 허가 공문을 보면 ‘고궁경내 흡연을 금함’이라고 명시했다. 그러나 당일 현장에서는 무분별한 흡연이 이어졌고, 담배를 들고 숲속을 가로질러 화장실에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담배를 피웠으므로 문화재청의 일부 직원들은 이를 제지하다가 곧 포기해버렸다. 오히려 외국인 흡연에 항의하는 시민단체 회원을 신문협회 스텝들이 가로막는 일까지 벌어졌다. 문화재청 관계자에 다시 항의하자 ‘현재 상황이 사실상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며 무기력하게 답할 뿐이었다.

최근 종묘제례 행사 때 벌어진 종묘정전 부근에서의 취식과 흡연, 박석훼손 사태 등은 문화유산에 대한 관리감독의 소홀함을 보여준 사례이다. 문화재청은 본연의 임무를 소홀히 한 채 음악회나 각종 행사 등의 유치에만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세 번째 궁궐활용 정책이 왜곡되었다. 문화재청은 해명자료에서 ‘앞으로도 이런 행사를 철저한 심의를 거쳐 허용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문화재청은 이번 행사와 관련, 독립기관인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제대로 거치지 않고 ‘보고처리’한 것으로 드러났다. 시민단체 관계자가 참여하는 ‘장소사용심의위원회’ 구성은 계속 연기되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수많은 국제행사 때마다, 힘있는 기관이 신청할 때마다 이런 행사를 허용하기 시작하면 궁궐 문턱은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궁궐을 올바로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소모적인 활용이고 정책적 훼손인 것이다.

국제행사마다, 힘있는 기관 신청할 때마다 궁궐사용할 것인가

궁궐은 후손들에게도 물려주어야 할 역사적 자산으로 지속가능한 활용의 원칙이 필요하다. 지속가능한 활용은 보존에 기초해야 하고 활용을 통해 문화유산 가치가 높아지거나 최소한 그 존엄성이 유지돼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문화유산의 역사성과 특성, 본래 기능에 기초한 활용이 이뤄져야 한다. 그래야 문화유산을 찾는 사람들은 그 가치를 제대로 알게 된다.

문화재청은 궁원문화재과를 '궁능활용과'로 개칭하고 적극적 활용정책을 취하면서 창덕궁 옥류천, 경복궁 경회루 개방 등 일반 시민의 관람권 확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활용만능주의는 안된다. 좀더 깊이 있는 연구와 시간이 필요하다. 활용을 반대하는 게 아니라 궁궐의 특성과 기능에 적합한 활용을 하자는 것이다. 마땅한 대안이 없다면 먹고 마시는 것으로 때우지 말고 내실을 갖춰 나중에 하자는 것이다.

네 번째 행사장 대여근거 규정인 ‘장소사용허가 규정’ 자체에 문제가 많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고궁의 효율적인 관리운영과 활용방안'이라는 주제로 연구용역을 실시했고 이를 바탕으로 장소사용허가에 대한 규정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보고서에는 ‘궁궐 본연의 기능과 가치에 무관한 단순 장소대여의 경우 허가를 제한할 필요가 있다’면서 ‘궁중 문화행사시에도 성격과 문화재훼손 위험여부 등을 고려하여 신중히 판단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보고서 결과와 달리 지난 3월 제정된 ‘궁·능원 및 유적장소 사용허가 규정’을 보면 공익 목적의 행사, 글짓기, 그림 그리기, 서예대회를 허가할 수 있다고 명시함으로써 궁궐의 역사나 성격과 무관한 각종 행사가 개최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로써 시민들의 관람권을 제약하고 궁궐의 가치를 훼손하는 행태가 더욱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무분별한 사용신청을 '장소사용료 징수' 규정으로 제한할 수 있다고 하지만 실효가 없다. 행사목적과 내용을 중심으로 허가대상을 규정, 궁궐의 가치를 높이면서 보존에 지장이 없는 행사를 유도하는 방향으로 개정돼야 한다.

‘사용허가 조건’을 지키지 않는 기관이나 단체에 대한 제재조치도 마련해야 한다. 현재는 ‘행사를 중지시킬 수 있다’는 비현실적 조항 외에는 제재방안이 전혀 없다. 사실상 주관기관의 약속 위반을 방조하고 있는 셈이다. 문화재청이 관람객 수와 수입증대를 쫓는 활용 만능주의에 젖어가는 게 아닌지, 힘있는 기관에 우리 문화유산을 임대하는 사업자로 전락하고 있는 게 아닌지 우려스럽다. <!-- update : 2005-06-03 오후 4:28:25-->

2005/06/03 오후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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