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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일 오후 3시 덕수궁 안수현 해설사님 감사합니다.

주종선
2023-07-03
조회수 509

전날 설악산 대청봉을 오른 후 좀 피곤했지만 오늘은 벌거벗은 한국사의 고종과 덕혜옹주를 보고 나서 덕수궁의 역사적 자취를 직접 보고 싶어서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미리 예약을 하지 않았는데도 무료로 덕수궁을 해설해주는 안수현 해설사님을 우연히 만나서 행운이었습니다.

얼마나 설명을 알기 쉽게 해주는지 귀에 쏙쏙 들어옵니다.


덕수궁(德壽宮)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었으며, 1907년 순종이 양위를 받고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고종이 오래 사시라는 뜻으로 그렇게 작명 하였습니다.

광화문에서 근정문까지 일직선인 경복궁과 다르게, 덕수궁의 대한문(大漢門)은 오른쪽으로 꺽어서 중화문이 있으므로 원래의 정문이 아니고 따로 있는 것으로 추측되지만 그 자리엔 돌담길로 막혀 있는걸 보면 첨부터 왕이 거주할 궁으로 건축한 게 아니고 월산대군의 거처를 고종이 살기 좋게 증축한 걸 알 수 있습니다.

중화문에는 황제가 다니는 계단, 즉 어칸(御間) 앞에는 서수(해태처럼 생겼는데 아니라고 했음)를 두 마리 놓고 쌍용을 새긴 답도를 설치했는데 문화재 개념이 부족한 시절 어린이의 미끄럼틀로 사용하여 돌(답도)이 많이 닳았습니다.


서울에 3개밖에 남지 않은 말 주차장 하마비(下馬碑).

황제 즉위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뜻깊은 곳 환구단(圜丘壇)과 황궁우(皇穹宇). 

하지만 환궁우는 있지만 환구단은 일제가 파괴하고 조선호텔을 짓는 만행을 저질렸습니다.

덕수궁 내에 많은 건축물이 촘촘히 들어서 있었지만 일제는 많이 헐어내고 그 자리에 많은 나무를 심어서 공원화하여 조선 역사를 단절하려고 노력했고 그 바람에 현재는 우리 국민이 자주 찾는 공원처럼 되었습니다.


일월오봉도가 있는 중화전 내부는 고종이 앉아 국정을 보았던 자리이고 중화전에 현재와 같이 다리가 셋 달린 청동 정형향로가 2개 있는데 향로 뚜껑이 사라졌다가 경복궁 박물관 실사 작업 때 다시 찾았습니다.

그리고 중화전 사이드 기둥에는 철제 문고리와 같은게 달려 있었는데 무슨 행사때 천막을 치기 쉽게 함이라고 했습니다.

드므는 '넓적하게 생긴 독'이라는 뜻의 순 우리말이며 항상 물을 담아 불의 악마가 그 물에 비친 자기 모습에 놀라서 도망가라는 뜻입니다. 즉 화재가 일어나지 말라는 뜻입니다.


석조전은 한일합방이 일어났던 1910년 준공된  건축물로 엄격한 비례와 좌우대칭이 돋보이는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서양식 건축물입니다.

준명당(浚眀堂)은 딸바보 고종이 덕혜공주의 유치원 교육으로 사용되었고 난간 돌에 원형 구멍이 나 있는 것은 덕혜옹주가 어린 시절 실수로 떨어져서 다치지 말라고 난간을 설치했던 구멍입니다.

준명당(浚眀堂)과 임금의 침전인 즉조당(卽阼堂)은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어린 덕혜옹주가 비를 맞지 않고 아바마마에게 쉽게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아치문인 유현문(維賢門)은 똑똑해지는 의미가 있어서 어린이의 단골 촬영 장소라고 하며 이곳을 지나면 동남아 건물과 비슷하고 발코니를 증축한듯한 정관헌(靜觀軒)이 나오며 커피매니아 고종이 이곳에서 커피를 즐겨 드셨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금속 난간에는 모란과 4마리의 박쥐, 소나무 사슴 등 한국의 전통 문양이 새겨져 있으며 5번째 박쥐는 기둥 윗부분에 있습니다.


함녕전(咸寧殿)은 원래 아관파천 후 고종이 기거할 침전으로 사용될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완공이 늦어져 빨리 오지 못했고 그후도 여러가지 이유로 늦어지다가 결국 조선이 망하고 나서야 1912년 10월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안수현 해설사님의 고종의 독살에 관한 설명입니다.


1. 1904년(광무 8년) 4월에 함녕전의 아궁이에서 불을 때다 대화재가 일어났습니다. 

소방서가 있었지만 웬일인지 일제에 의해 불을 끄지 않았고(아마도 고종을 죽이려고) 그 바람에 덕수궁(경운궁)의 전체 전각 중 2/3가 불 타 사라졌습니다. 

예전에도 누군가 고증이 마시는 커피에 대량의 아편을 넣어서 독살을 시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1919년 1월 21일 매우 건강했던 고종이 식혜를 마신지 30분도 안되어 심한 경련을 일으키다가 죽었습니다.


2. 고종 황제의 팔다리가 1~2일 만에 엄청나게 부어올라서, 고종의 통 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만 했습니다.


3. 솜으로 고종의 입안을 닦아내는데, 고종의 이가 모두 구강 안에 빠져 있고 혀는 닳아 없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4. 30센티 미터 가량 되는 검은 줄이 목 부위에서부터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습니다.


5. 고종이 승하한 후에 하루 이틀 사이로 식혜를 고종에게 드린 2명의 궁녀가 차례로 의문사 했습니다.


6. 대한제국 황제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독살설이 퍼진 것이 그해 3.1 운동이 발발한 직접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만약에 제가 안수현 해설사님을만나지 않았더라면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이 덕수궁의 겉모습만 대충 보고 돌아갔을 것입니다.

다시 한번 안수현 해설사님의 자세한 설명에 대해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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